거래의 맛
오늘은 신발장에 처박힌 배드민턴 채를 올린다.
당근 마켓에 물건을 올려놓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줄곧 팔기만 했는데 내가 사게 되는 일도 올까?
처분하면서 느끼는 홀가분 말고
다시 반대의 기분도 느끼게 될까?
*미래의 코난에게 이 책을 팝니다. <셜록홈즈의 사건> 책
*이 원피스에 도전할 용자를 찾습니다. (도전하기 어려운 옷 실제 사진 첨부)
물건에 상관없이 카피가 재밌어서 사고 싶어진다.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본다.
만약 당근 마켓에 이 물건이 올라온다면
나는 바로 사버리고야 말 거다.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난 후 친구가 묻는다.
“넌 어떤 부분이 좋았어? “
“난 윤희 목도리가 젤 좋았어”
‘뭐? 좋은 부분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목도리야?’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보통 목도리처럼 보이지만 보통 목도리가 아니다.
‘평생을 마음속에 품고 지닌 사람을
혹시나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하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최선을 다해 꾸미고 나왔습니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티 나지 않는 선에서 몰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다.
첫사랑은 자국이 남는데
윤희의 표정에 너무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런 흔적이 내 눈에는 잘 뛴다.
힘든 사랑을 하는 사람에겐 유독 마음이 쓰인다.
나와 닮아 있어서
인생에서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를
품고 다니는 기분은 자신을 최선 다해 다듬게 만든다.
지구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윤희 목도리 비슷한 게 올라온다면 난 무조건 살 거다.
그 목도리는 ‘나에게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를 상징한다.
두 번째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 나오는 모기장이다.
나도 모기장을 치고 자던 유년기 시절의 여름밤이 있었다.
첨엔 점선으로 된 나만의 방을 갖게 되어 설렜다.
공주놀이도 실컷 하고 그 안에 있으면 마치 미지의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모기장만 봐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근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아니 절대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당시 난 미스터리 한 불치병
지긋지긋한 여드름과 싸우고 있었는데
오죽하면 담임이 진로상담시간에 한다는 소리가
“넌 왜 이렇게 여드름이 나니”였다.
내 진로보다 시급한 중대 문제 사안이었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울거나 그러진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괜찮은 척하고 있다가
방송반 캐비닛 뒤에 와서 대성통곡했다.
그때 내가 방송반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 혼자 울 수 있는 공간은 있었으니까
그 당시 캐비닛 안에 화이트 맥주라는 게
채워졌다 없어졌다를 반복했다.
그 맛도 궁금했는데 누가 그걸 넣어뒀는지도 궁금했다.
나중에 그걸로 우린 단체로 혼났다.
그런데 끝까지 범인을 못 잡았다.
맥주의 첫인상이 대략
‘만나서 별로 였고 다신 만나지 말자’ 였는데
먼 훗날 난 맥주 전도사가 된다.
“처음으로 나 시집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달팽인데 달팽이집이 없는 느낌이 들어, 그게 얼마나 불안해?”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때때로 힘들어하던 그녀였다.
지혜롭게 그 고비를 잘 넘겨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엔 심각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녀를 할퀴었고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남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결혼으로 도망치는 건 절대 안 된다. 막아야 한다.
이런 달팽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후배가 있다.
그런데 후배는 조금 덜 힘겨워 보였다.
사람 때문에 힘든 건 매한가지인데, 이 둘의 차이는?
그래 역시 맥주였던 걸까?
맥주라면 대낮부터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후배 얼굴이 떠오른다.
무인도로 촬영 갈 땐 맥주를 박스째로 들고 갔던 그 아이.
그걸 로도 부족해서 케리어가 우르르 캔맥주를 토해낼 때, 내 눈을 의심케 했던 아이.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괴롭다고 울부짖으며 맥주를 물처럼 마셔댔던 그 아이.
사노 요코가 인생의 위기엔 죽은 척을 하라 했는데 그 아이는 정말 죽을 것처럼
맥주를 들이부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다시 살아났다.
다 마신 맥주 캔을 우걱우걱 구기면서
콱하고 내려놓는 순간 털어버리는 거다.
그래 그게 강력한 힌트다!
그럴 땐 맥주가 나쁜 잡귀를 다 털어내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선 특유의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일까?
그래, 달팽이는 맥주를 모르는 세계에 갇혀 살았다.
두 눈을 감아야 비로소 펼쳐지는 세계가 있듯이,
맥주를 알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세계가 얼마나 큰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문자로 막 하트도 보낼 수 있고
옆집으로 들어가 자버릴 수도 있고
(실제로 그랬다가 결혼한 커플을 난 알고 있다.)
맘에 안 드는 선배 신발도 숨길 수 있는데.
그리고 체코 격언에
‘맥주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증거’라는 말처럼
맥주를 마시는 순간에는
정말 우주로 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실한 감촉이 맴돈다.
그러고 보니 달팽이가 맥주 한잔을 끝까지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달팽이에겐 맥주가 절실하다.
사람이 어떻게 괴물로 변해? 그거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이러쿵저러쿵 할 시간에 맥주나 마시자.
어떤 세계로 진입할 땐 그 손을 잡고 끌고 들어가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 역시 처음 진정한 맥주 맛을 알게 되는 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여름밤, 우린 배드민턴을 쳤다.
중요한 내기를 했고 그 경기만큼은 지기 싫었다.
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셔틀콕 하나만 보며 뛰어다녔다.
그리곤 그가 내 앞에 생맥주 한잔을 내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재미없는 인간?
아니다 불쌍한 인간이었다.
맥주 맛도 모르는 주제에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저 쓴 걸 무슨 맛으로 마셔?
아니 맥주는 쓰지 않다. 고소하고 부드럽고 시원하다.
그가 나에게 생맥주를 알려주었듯이, 이번에 내 차례다.
배드민턴 채를 매고 달팽이에게 가자!
맥주 맛을 알려주기 위해선 이게 직방이다!
근데 셔틀콕이 없네?
이런 것쯤은 당근 마켓에서 사자며 검색하고 있는 나.
내게도 뭔가를 사게 되는 날이 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