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스킨 -> 트위터
자기만의 노트가 있는 사람은, 그 노트가 몰스킨일 확률은 굉장히 높다.
그동안 수많은 연예인들과 미팅을 했었는데
자기만의 노트를 끼고 왔던 사람은 딱 한 명 있었다.
보통은 커피를 들고 오거나 빈손으로 나타난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온 출연자도 봤다.
대충 얼굴도장만 찍고 다음 스케줄로 급하게 이동하는 그들을 숱하게 봤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말을 몰스킨에 적고 있다니!
예능작가 시작하고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보통 한 프로그램을 하고 나면 출연자와 어느 정도의 우정이 쌓이곤 한다.
그런데 그 몰스킨 노트 때문에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내가 내어줄 수 있는 모든 애정, 지지,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았던 지라
미팅 때 몰스킨 들고 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같이 일하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 이후론 본 적이 없다.
근데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본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만의 노트를 가진 사람은 자기만의 스피릿을 가지고 있다.
spirit [ˈspɪrɪt]
1. 정신, 영혼
2. 기분, 마음
3. (특정한 유형의) 사람
만약, 죽음의 수용소에 떨어져도 자신이 선택한 태도로
하루의 의미를 찾아갈 것이다.
아무리 힘든 걸 시켜도 제작진의 의도를 귀신같이 파악하곤
힘들어서 못한다~ 이런 거 시키면 집에 간다~ 이런 소리는 안 한다.
둘째, 무방비상태로 귀여움을 대방출한다.
의견이 다를 때 센스 있는 질문으로 오해를 줄이고
생각지도 못한 호기심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제작진을 감동시킨다.
(정말 그럴 때마다 업고 다닐 수도 있다고!)
셋째, 자기 자신의 인생을 존중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생도 존중할 줄 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나도 존중 받음과 동시에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 자존감 있는 사람이랑 일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고작 예능프로 하나 하면서도 사는 맛이 난다.
몰스킨도 좋아하지만 몰스킨 쓰는 사람에게 무한 신뢰가 생긴다.
예전엔 기분이 우울해지면 옷을 샀다.
쇼핑을 하면 빠르게, 아주 잠시 행복했다.
그리곤 그것들은 예쁜 쓰레기가 되었다.
“집이랑 와이프는 못 바꿔도
노트는 내 맘대로 바꿀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김정훈 교수가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게 바로 노트라고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몰스킨 사재기의 큰손이 되었다.
물러 터진 마음을 딱딱하고 검고 네모 반듯한 것에
놓아두어야 안심이 되었다.
몰스킨은 방황하는 내 마음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한정판에 집착하면서부터
그걸 구하지 못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여행만 가면 그 도시에서 몰스킨을 사 모았다.
누군가가 도시별 스타벅스 텀블러를 모으듯 나에겐 그게 몰스킨이었다.
한정판은 꼭 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키티, 도라에몽, 레고 등등 한정판의 세계는 무궁무진했고
그렇게 어렵게 사놓고는 또 쓰지도 않고 고이 모셔두었다.
급기야 어느 날 내게 몰스킨 권태기가 찾아왔다.
택시를 탈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샘솟곤 했는데
몰스킨을 두고 와서 종종 트위터에 써두게 되었다.
어느 날 탄 택시가 온통 헬로키티로 꾸며져 있었다.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었다.
기사님은 아무리 술 먹고 탄 사람도 이건 알아본다며 좋아하셨다.
본인이 죽을병에 걸려서 다시 살아났는데
그 계기로 택시를 이렇게 꾸몄다고 한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즐겁게 살고 싶어서 앞쪽을 키티로 꾸몄는데
손님들이 너무 좋아해서 뒤쪽까지 키티로 대동단결!
그래,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허다!
자기가 일하는 공간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면 이게 천국이지 뭐야.
또 재밌는 기사님이 있었는데 신호등 신호가 바뀌자 책을 꺼내 드는 거였다.
아니 이건 다큐도 아니고 시트콤이다.
차 없이 뚜벅이로 살아온 택시족 외길 20년!
그토록 신기한 택시 기사님을 많이 만나봤지만 이 광경은 처음이고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어서 읽고 싶어 안달이 났길래
그 짧은 15초를 알뜰하게 쓰시는 거지?
그 책 저자는 너무 행복할 거 같다. 저런 책을 쓰자 나여!
또 별난 기사 아저씨가 있었는데
“미생이라는 만화가 도대체 뭐예요?
손님들이 왜 그거 보면서 우는 거예요?”
택시에서 만화책 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님이 내릴 때 책 한 권을 내미셨다. 설마 미생?(잠시 기대)
미생은 아니었고 월간 좋은 생각류의 글 모음 잡지였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그 안 첫 장에는 1000번째 손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몇 번째 손님인지 다 세고 있었던 거야?
너무 감동인데 벌써 가버린 택시 아저씨에게 마음을 전달할 길은 없다.
이런 것들을 트위터에 기록해 뒀다.
몰스킨에 외롭게 쓰는 것보다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와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는 바쁜 내 절친 보다
즉각적으로 하트를 보내주는 트위터 친구들이 내겐 더 큰 위안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트위터에 빠져들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와 몰스킨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면서도 트위터에 차마 쓰지 못한 것들은 몰스킨에 적어두었다.
난 어쩌다 그걸 잃어버렸고 그 후유증으로 몰스킨을 손절했다. (주변에선 몰스킨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했다)
“이름이랑 연락처 없으면 못 찾아요.”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써둘 생각은 애초에 안 해 봤다.
너무 찌질해서 손 떨리는 그 기록들,
누군지 몰라도 그걸 주웠다면, 아.... 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작고 귀여운 여우를 그리는 게 싫다.
나는 캐릭터의 눈을 그리지 않는데
디즈니에선 큰 눈만 그리라고 요구한다.
팀 버튼이 디즈니를 떠날 때 했던 고민이라고 한다.
(그래 존버만이 답은 아니야)
그도 자기만의 노트에 이렇게 일기로 썼겠지.
전형적인 디즈니 스타일과 맞지 않았던 그는
그곳을 나와 자신만의 스타일을 펼친다.
난 팀 버튼도 아니고 팀 버튼 레베루도 아니지만
저 심정이 너무 내 처지와 딱 맞았다.
드라마 계약을 중도 해지했을 때 난 팀 버튼으로 빙의했다.
아무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저 글을 되새기며 버텼다.
저 메모를 마르고 닳도록 매일 써놔서 이제 외울 정도다.
그 당시엔 저 말만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남들이 보기엔 망했을지 모르겠지만
나 혼자서는 내가 원하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여기고 있다.
(포장의 달인)
트위터에는 차마 올리지 못한 흑역사이지만
대신 단 한 명과 깊은 공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당근마켓엔 다 쓴 일기장도 올라온다고 들었는데 설마 내껀 아니겠지?
(돈 주고 읽을 정도로 재밌진 않다 다만 눈물콧물은 보장)
내 몰스킨을 주운 사람이 누구인 줄은 모르겠지만
집에 모셔놓은 몰스킨 새 노트 들을 팔아 트위터 주식을 산다.
오직 트위터를 통해서만 와 닿는 것들이 있다.
"아기들은 원래 귀여운데, 제 동생이 특별히 더 귀여운 이유가 뭘까요?"
어린이 과학상담코너에 걸려온 전화라고 한다.
90도로 인사, 허그하면서 인사, 손 흔들면서 인사, 말로만 인사.
한 유치원에서는 인사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번호로 고른 다음에 인사를 한다.
나라면 손 흔들면서 인사했겠지?
막상 알아두면 쓸데없는 이야기 일지 몰라도
거기엔 서서히 퍼지는 작고 소중한 온기가 있다.
앞으로 수많은 미디어 플랫폼의 흥망성쇠가 있더라도
우리 트위터~만은 영원했으면 좋겠다.
이건 순전히 팬심으로 산다.
힘든 과거에 대한 복수는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잘 미셀 바스키아-
방금 피드에 올라온 이글을 리트윗 하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한다.
트위터 친구들 절대 못 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