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지우며 떠오르는 얼굴

노트북 -> 아마존

by 보리차


작은 물건 하나가 나를 둘러싼 세계를 통째로 바꾸어 놓을 때가 있다.


n 년 전, 그때 난 예능일을 하던 메인 노트북이 있었고

예능일을 제외한 나머지 일들을 벌일 세컨드 노트북이 필요했다.

물론 가지고 있던 노트북으로 책 에세이 작업을 해도 되지만

그건 책에 대한, 예능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땐 당근 마켓 같은 것도 없었고

장마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여름날 무언가에 홀려서

중고 노트북 100만 원이라는 글만 보고

행여 누가 뺏어갈까 전전긍긍하며 택시 타고 직진했다.


그 노트북을 무사히 손에 넣었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됐다.

매출 기록 엑셀 파일들과 사직서.

회사를 갓 퇴사한 사람이 다 지웠다고 생각하고 넘긴 중고 노트북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이 많았다.


그 노트북으로 나는 한 권의 책을 내고 웹드라마를 집필했다.

배터리가 말썽을 부려 중간에 교체하기도 했고

바이러스를 먹어 사설업체에 맡겨 다시 태어나기도 한 노트북이다.

나와 함께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

하지만 아이패드가 생기면서 1년 동안 손도 대지 않았다. 결국 팔기로 했다.

전 주인이 알려준 고마운 깨달음,

포맷을 하더라도 지워야 할 중요한 파일은 내 손으로 하나하나 지우자. 확인사살만이 살길이다.

안 그러면 다음주인에게 비웃음, 찝찝함, 과도한 상상 등등을 제공할 것이다.

업계의 특성상 내 노트북에는 후배 작가들의 이력서 폴더도 있다.

중요한 개인정보이니 깨끗이 지워야 했다.


지우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꼈던 후배들, 그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생각해보니 다 밥을 맛있게 먹었다.

한마디로 먹을 줄 아는 애들이랑 일도 재밌게 했다.


늘 반바지 차림의 아리.

종아리가 동그란 달걀을 심어 놓은 것처럼 알 근육이라 별명이 종아리인데

우린 거기서 종을 빼고 아리라고 불렀다. 그 어감이 귀여워서.


전날 밤 지방 답사를 늦게까지 돌아다니던 우리 팀은

금요일 오전 빈속을 부여잡고 시사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먼지투성이 좁아터진 편집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토스트를 넣어주는 아리의 손길, 우리의 구세주였다.

kbs정문과는 조금 애매하게 떨어진 길거리에서 파는 그 토스트.

뜨거웠기 때문에 식빵의 촉촉함이 살아있고

거기에 밀착된 딸기잼과 치즈와 양배추가 사이좋게 밸런스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늘 아린 전력질주를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리에게 축지법이라도 있어야 했을 것이다.

도저히 뜨거울 래야 뜨거울 수 없는 거리다.

미지근한 아메리카노가 맛 대가리 없는 것처럼

아리는 이게 식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았던 거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전력 질주했을 아리를,

그 터질 것 같은 종아리를 생각하면

그게 종아리 근육만 튼튼해선 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애초에 마음 근육이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밥 잘 먹는 후배들을 좋아했고

술 잘 먹는 후배들은 사랑했다.


매년 내 생일날 그녀는 케이크 쿠폰을 내게 보낸다.

난 아무리 좋아하는 선배가 있더라도 매년은 못 할 것만 같다.

귀찮기도 하고, 왠지 생일 케이크 쿠폰이라는 건 좀 너무 거창하다.

그녀가 쿠폰을 보낼 때.

그리고 무심코 놔뒀다가는 사용기간이 다 되어서 경고 메시지가 올 때.

그녀를 두 번 생각한다.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은 그녀를 떠올리는 셈이다.


그녀는 조금 신기하고 특별한 후배였기 때문에 꼭 그 쿠폰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툭툭 떠오르기도 한다.

바쁜 와중에 언니 잠깐만요 하고 로비를 다녀오면

늘 그녀의 손에는 명품 선물이 들려있었다.

마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주인공 캐릭터 같았다.

그런 명품보다 그녀를 더 빛나게 하는 건 일할 때 그녀의 태도였다.

어느 날 헤이리 답사를 다녀왔는데 정리된 답사 사진의 앵글이 조금 달라 보였다.

이건 뭐지? 내가 그날 잘못 본건가? 이상하네

알고 보니 그녀는 혼자 그곳을 다시 갔다고 했다.

통째로 답사 사진을 잃어버리고는

그냥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도 있던 걸

다시 그 먼 길을 다녀온 것이다.

그녀의 책임감과 추진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은 새벽까지 나이트에서 놀다가 바로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던 그녀였다.

나는 그래서 그녀를 요정이라 불렀다.

이 세상 사람이라 하기엔 체력 클래스가 달랐다.

그녀가 뿜고 다니는 경쾌한 에너지에 나도 전염이 되곤 했다.

딱 한번 실수로 늦는 걸 보았다. 아 그녀도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직언을 내뱉곤 했다.

아니 직언이 아니라 신선한 독설이었다.

당장 잘릴지도 모르는 독설을 용감하게 내뱉었는데,

이점이 내겐 비현실적인 히어로처럼 느껴졌다.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 일수록 독설의 강도가 높았고

그 독설은 모두를 매료시켰다.

아마 막내작가에게 이런 독설을 들을 기회는 모두가 처음일 것이다.

나중엔 국장님까지 독설을 들으러 왔다는 소문이 있다. 아, 우리 모두에게 요정이 필요했던 거였어!


(최불암 선생님이 연기를 그만두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아무도 자신의 연기에 지적을 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가 있다)


알고 보면 모두가 막내작가는 이러해야 한다는 틀에 갇혀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 게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그러고 있었던 걸까?


과감한 그녀의 사랑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청춘 같았다.

하루키 아저씨가 한 말을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 그녀였다.


돈도 소중하고 일도 소중하지만,

진심으로 별을 바라보거나 기타 소리에 미친 듯이 끌려들거나 하는 시기란

인생에서 극히 잠깐밖에 없으며,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디오-


스무 살이 넘으면 모두 친구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 시절 잠시나마 가까이에서 그녀의 인생을 엿보곤 했지만

정말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할 정도로 놀라운 센스들의 출처는 알지 못했다.

만약 괜찮다면 정말 묻고 싶은 게 있다.

독설 요정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

너 정말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니?


이력서 폴더를 휴지통에 버리고 휴지통 비우기를 클릭했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이력이지만 늘 내 뒤에서 탄탄하게 받쳐주던 후배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런 올드한 말을 하는 선배가 되고 싶진 않다. 중간에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수를 탄 후배도 있다. 이런 저런 후배들에게 배운 것이 많은데 그건 말 다신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


굳이 가지고 있어도 될 노트북을 왜 처분하냐고들 묻는다.

잉여 물건들이 늘어날 때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늘어 가는 것 같다.

물건과 헤어질 때 내 인생이 깨끗이 비워지는 쾌감이 있다.

물건을 버리면 거기에 엉킨 감정까지 패키지로 버릴 수 있다.


예능작가 시절 우리 후배들이 날 유두리 선배로 불렀다.

대세에 지장 없으면 촬영 순서 바꿔서 동선 줄이는 게 내 특기였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야 보고서 만드느라 일할 시간이 없다.”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기획안이나 대본 파일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더 중요한 건 포장이 아니라 알맹이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모든 문서의 PPT화를 없애라고 공식 지시했다.

언제나 A4용지에 적힌 메모를 읽으며 회의를 시작한다고 했다.

바로 이점이다. 너무 아름답다!

이런 건 전 세계적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한 후배가 고민을 토로하길,

요즘 후배들은 급하다고 대본 빨리 넘기라고 했더니 제목도 없이 보낸다고 했다.

아니 아무리 유두리가 중허다 해도 바지는 입고 나가야지 얘들아! 누드는 안 돼!)


노트북을 팔아 아마존 주식을 산다.

미국에선 아마존 없이 살 수 없고

아마존이 더욱 커질 거라는 건 지나가는 동네 개들도 알 것이다.

그런데 난 이 회장의 유두리만 봐도 아마존의 미래를 알 것 같다.

난 그 유두리를 너무 사랑한다.

그 유두리 스피릿에 기립 물개 박수를 보낸다.


난 앞으로도 대세에 지장 없는 한 불필요한 형식, 격식, 절차 다 생략하며 살아갈 것이다.

남들이 나보고 관혼상제 다 쌩까고 산다고 뭐라하지만 난 그것에 평온함을 느낀다.


10년 후에 오른 아마존 주식으로

밥 잘 먹는 후배, 술 잘 먹는 후배 다 불러서 여행가야지.

주식을 살 때마다 자꾸 뜬금없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과거를 정리해서 마래의 나에게 선물하는 이 일이 즐겁다.

얘들아 ~그때 유두리 있게 나랑 놀아줘!

이전 01화'자기만의 시스템'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