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시스템'이 있으신가요?

거래의 맛

by 보리차

테니스를 오랫동안 쳐온 선배가 말했다.

작가 생활을 계속하려면 확실한 취미가 있어야 한다고.

그 선배는 정말 지치지 않아 보였다.

일이 힘들 땐 라켓을 메고 코트로 향했다.

방송국 놈들이 아닌 테니스 피플과 어울리다 오면 에너지가 차올랐다.

그 선배는 맥주 앞에서도, 커피 앞에서도 늘 같은 이야기를 했다.

확실한 취미를 만들라고.

그런데 그땐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당시에 클럽 작가라고 불리 우는 전설의 작가가 있었는데

대본을 쓰다가 안 풀리면 바로 클럽을 다녀온다 했다.

가서 딱 1시간만 춤을 추고 오면 막혔던 모든 것이 뚫린다 했다.

난 그 소문을 첨 들었을 때 조금 놀랐다.

그분은 클럽과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인사동으로 가서 차를 마시고 오는 게 어울릴 법했다.

클럽에서는 이렇게 입고 오는 사람이 처음이라 굉장히 신선했을 수도 있다.

최악의 팀에서도 클럽을 다니면 즐겁게 일할 수 있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일과 취미의 균형 감각.

취미 생활의 유무는 롱런의 리트머스 였다.


나도 똑 부러지는 취미를 만들고 싶었는데 하다 보니 종류가 늘어났다.

타로카드, 향초 만들기, 꽃꽂이, 도자기, 우쿨렐레 등등

다양한 걸 짧게 맛보고는 또 새로운 호기심이 샘솟아 전혀 다른 것들에 도전하곤 했다.

어쩌다 보니 원데이 클래스 성지 투어를 했다.

그런데 딱 이거다 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걸 하는 동안은 나머지를 다 잊게 했다.

오직 그 세계로만 빨려 들어가는 몰입감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고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후배들에게

잉여 물건 팔아서 주식을 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래의 나 자신이 지금 나에게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취미를 가지라는 선배와 똑같은 눈빛으로,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선배와 똑같은 몸짓으로

정말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우리들에겐 박진영이 없기 때문이다.

박진영은 아티스트들에게 가수를 안 하더라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외국어를 공부하게 하고

책을 읽게 하고

기사를 읽게 하고

성교육을 받게 하고

건강한 것들을 먹게 하는

환경을 설정해 준다.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에겐 박진영이 없으니까

스스로 자기 자신을 프로듀싱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시스템이 필요한 거다.


작가생활이 잘 풀리지 않을때

당황하지 않고 헤메지 않을 시스템.


그렇다면 여기서 대한민국 방송작가란 무엇인가?

일하는 시스템이 특이해서 논문으로 나올 정도의 대단한 연구대상 감이다.

실제로 이 논문을 쓰는 분이 날 인터뷰했는데

정말 기가 차는 환경에서 일했던 과거가 떠올라 말문이 막혔다.


여하튼 우리는 남들보다는 더 큰 용량의 지랄 총량의 법칙을 겪는다.

어떤 때는 그게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가 있는데 우린 도망칠 곳이 없다.

그럴 때를 대비한 믿는 구석이 바로

중고거래로 사둔 주식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지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일 아직 안 겪어 봤다고?

그 일은 아무리 단단한 사람일지라도 통째로 무너져 산산조각 나 버리게 만든다.

로또에 걸려도 작가를 계속하겠다는 선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진짜 로또에라도 당첨된 걸까?

우리 팀은 난리가 났고 내 작가 인생 통틀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후배들이 사라지는 건 봤는데 선배가 사라진 건 처음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종이는 사람보다 잘 견딘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 선배만큼은 종이보다 잘 견디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무리가 얼마나 처참하게 괴롭혔으면...


선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던 거 같다.

그 프로그램은 없어졌고 지금 그 선배는 업계에서 아주 잘 나가는 작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분야의 천재로 등극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지금 선배의 커리어는 화려하다.

선배의 존멋 도망 일화는 전래동화처럼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분명 선배에겐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만나면 그게 뭐였는지 꼭 캐내고 싶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가 도망칠 수 있는 용기를 복 돋아 주었을 거다.

그때 사라질 수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획을 그으며 일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믿는 구석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테니스를 치면서, 클럽을 다니면서, 원데이 클래스를 전전하면서 말이다.

믿는 구석의 구체적인 시스템만 있으면 된다.

그럼 악의 무리가 지랄을 떨때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

우린 박진영이 없으니까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내 방식은 중고거래로 주식사기인데, 당신의 시스템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