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뒷주머니가 가져온 요상한 평온

슬램덩크 만화책 ->애플

by 보리차

유모차가 두 대나 있었지만 가볍게 들고 다닐 마트 휴대용 하나가 더 필요했다.

막상 내손으로 애를 키워보고서야 알았다. 유모차가 있는 데 왜 또 유모차를 사는지...

새로 사려니 아깝고 당근 마켓 뒤지니 깨끗하고 가격도 괜찮은 물건이 보였다.

그래 이거다. 신속한 거래를 위해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무릎 나온 운동복에 어차피 마스크 쓸거니 대애충, 나갔다.

아이디 슈가 퐁퐁님은 풀 샷으로 보니 성별은 남자였고, 1미터 반경 내 시선으로 들어왔을 때

좀 전에 먹은 라테가 중력을 거슬러 내입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유모차를 든 손은, 그 손은...

체형에 비해 유난히 팔이 길어 내가 원숭이라고 놀리던...

2년 전 결혼 파투 내고 잠수 탄 개새끼였다.


이 시놉을 쓰고 있는데 아니, 지금 내가 이걸 쓰고 있을 게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안 해보고 왜 남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냐고,

아무리 픽션이라도 내가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했었지 아마.

그래서 이 글이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였구나.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움직여!

그렇게 친구를 통해 알고만 있었던 당근 마켓에 입문하게 되었다.

뭘 팔지?

팔아야 할 것은 많았는데 막상 실행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그래, 이참에 이걸 팔자. 슬램덩크 전집.


시세를 알아보고 12만 원으로 올렸더니 바로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고파는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난 이걸 사러 온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미쳤고

그 사람은 내가 이걸 왜 파는지 궁금해 미쳐하는 얼굴이었다.

어지간해선 슬램덩크 만화책을 팔기란 힘들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아 제가 곧 결혼하는데 예비신랑도 슬램덩크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요.

서재 결혼시키기, 뭐 그런 거 아시죠?”


계좌이체로 받을 생각이었는데 현금 12만 원을 내 손에 얹혀 주었다.

요즘 시대에 이런 금액의 현금을 쥐어보는 감촉도 오랜만이다.

나 이걸로 뭐하지?

슬램덩크 전집이 빠져나간 빈 책장이 허전했다.

나머지 책들도 조금씩 곧 당근 마켓 행으로 이어질 것을 예감했다.

그동안 난 내가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다 읽지도 못하는 책을 사다 나르고

책으론 어떤 과소비를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책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거였다.

그래서 구경이 끝난 책들은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만의 방>도 새로운 리커버 디자인에 홀려 최근에 또 구입했다.

책이 너무 많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책들조차 너무 많이 이고 지고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번뜩, 내 손끝을 스치는 강렬한 느낌.

<자기만의 방>의 리커버 책과 내 손에 들어온 뜻밖의 현금이 만나 만든 콜라보!

자기만의 방처럼 자기만의 뒷주머니가 필요하다! 아주 절실히!


결혼을 하던 안 하던 연애를 하던 안 하던

한 개인에겐 무조건 필요한 안전장치다.

적어도 돈에 휘둘려 이상한 선택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게 단지 결혼을 앞둔 사람의 불안감만은 아닐 것이다.

그날이 ‘자기만의 뒷주머니’를 만들게 된 시작이었다.


어쩌면 난 <슬램덩크>에 모든 걸 걸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도 전집 있는데.”

그 말 한마디에 결혼해도 괜찮은 사람이라 확신했다.

그건 “슬램덩크 나도 좋아하는데”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치감이었다.

오롯이 전집을 가져본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둘만의 찌찌뽕이다.

“나 짐으로 안 붙이고 안고 탔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안고 탔잖아’ 그 부분에서

나는 완전히 그에게 기울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갔던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다시 한국에 놀러 와

슬램덩크를 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인 만화 가게에서 빌려봤던 그 만화책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고 결심했고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의 품에 안겼던 슬램덩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안고 탔잖아’ 그 워딩에 꽂혀서

나는 그의 품에 안길 때마다 마치 내가 슬램덩크 만화책이 되는 기분이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우리가 평생에 걸쳐 깊은 의리를 나눌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당신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이걸 둘만의 유행어로 여기고

전성기란 아직 오직 않았고 그 비슷한 게 왔더라도

계속 갱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았던 이유는

슬램덩크라는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는 사회에서 겉도는 우리같은 인간들에겐

마음의 베이스 캠프 같은 존재였다.

그 세계로 속절없이 쑥 빨려 들어가버리는 경험을

나눠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가 된 듯 했다.


가령 속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슬랭 덩크 전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이상한 우월감을 줬다.


슬램덩크를 전집으로 간직하는 인간이라는 점, 그래 그거 하나면 됐어!

이 한 가지에 홀랑 꽂혀서 내 마음은 이미 많은 것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나라에 사는 사람과의 결혼이란

마음의 진행 말고도 너무 많은 서류의 진행이 필요했다.

그건 매우 까다롭고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라

마음고생은 패키지로 따라왔다.

그러던 와중 코비드 19로 내 인생이 일시정지 됐다.

비자절차는 무기한 정지됐고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럴 때 나훈아 아저씨가 테스형을 붙들었다면

우리에겐 슬램덩크였다.


슬램덩크 전집을 간직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무기한 롱디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때 슬램덩크 찌찌뽕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안 겪고 살았을 거 아니냐며 만화책을 원망했다.

담배 끊는 걸 힘겨워하는 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그래, 슬램덩크를 안고 비행기 탔던 인간이 그럴 리가 없어

설마 슬램덩크 마케팅에 내가 넘어 간 거야?’


맞다, 내가 넘어갔다.

모든 힘든 일을 제쳐놓고 슬램덩크를 보고 있으면

‘슬램덩크에 이용당한 거였어도 좋아! ’

다시 이 기분으로 돌아갔다.

그런 우리들에게 슬램덩크 전집은 한 세트로 충분했고

내가 가진 걸 처분하기로 혼자 결심했다.

슬램덩크의 물리적인 처분은 진정한 결혼 준비 시작을 상징했다.

막상 이걸 정리하고 나니 내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앞으로 ‘자기만의 뒷주머니’를 채워나갈 생각을 하니

처분할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을지가 또렷해지고

그러면서 요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책 만 들고 와.”

이런 프러포즈를 받을 때만 해도 속으로는

‘결혼 같은 걸 하게 되더라도

각자 자기만의 책장을 갖자’ 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1인 1 책’이런 사치 부리지 말고

겹치는 책은 상쾌하게 처분하자’가 되었다.


최근 결혼한 언니가 한마디로 결혼을 압축해 버렸다.

“결혼은 네가 입고 있는 팬티 벗어서 보여주는 거야.”

아니, 그렇게 까지요?

전 아직 해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지껄이는 건 줄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우리들이 간직한 슬램덩크를 순간마다 다시 꺼내보는 일’로 만들고 싶네요.

(아직 정신 못 차림)


슬램덩크를 팔아 산 애플 주식은 10년 후엔 n배 오를 것이다.

그동안 애플의 노예로 몇 번 정도 아이폰을 바꿀 것이고

애플 워치로 우울증 관리도 받게 되겠지

그때쯤이면 그 언니의 말이 완벽히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들의 슬램덩크는 많이 너덜너덜 해 져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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