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맛
우리는 이런 걸로도 싸울 수 있는 커플이랍니다.
라는 대회가 있다면 분명 1등 할 거다.
부부싸움의 이유를 듣고 있으면
눈앞에 시트콤이 그려진다.
여행을 좋아해서 주말마다 작은 여행을 하는 두 사람.
눈이 많이 와서 국도로 돌아가자 그녀는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양평휴게소 들리는 거지?”
그러자 남편은 휴게소를 들러
호두과자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뛰어간다.
2천 원 치가 아닌 5천 원 치의 호두과자를 샀다.
분명 그녀가 더 기뻐할 거라 예상했을 거다.
그걸 받아 든 그녀는 화를 냈다.
그녀가 휴게소 호두과자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는
겉은 바삭한데 안은 촉촉했기 때문이다.
그 반전 식감을 좋아했던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
5천 원 치를 사면 박스에 담아준다.
여기서 문제는 저 박스다.
김이 빠져나갈 수 없어 호두과자가 눅눅해진다.
2천 원 치는 그냥 종이봉투다.
그건 위가 뚫려있어서
차가운 공기가 샤샤샤 내려앉아 겉이 바삭하다는 거다.
호두과자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녀의 발견이다.
호두과자의 세계란 그런 것이구나
그녀는 다시 차에서 내려 2천 원 치 호두과자를 사러 간다.
눅눅한 호두과자 따위로 오늘 하루를 망칠 수 없다.
이 부분이다. 난 여기서 물개 박수를 쳤다.
역시 내 친구야 하면서
그녀는 탐구생활을 같이 하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수정해 나갔다.
그걸 따라 하던 나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나의 베프이고 그녀의 남편은 내 전남친의 베프였다.
나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우리 커플의 헤어짐과는 전혀 아랑곳 않고 부부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그녀가 들려주는 부부싸움 이야기는
‘어머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싸움도 못 해보고 어쩔 뻔했어!’
이 둘의 미친 케미를 듣고 있자면 내가 조금은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일로도 싸울 수 있다니 둘은 정말 서로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싸움의 이유가 너무 기상천외해서 매번 궁금해진다.
친구 부부 싸우는 이야기 들으면서 행복해하는 나란 인간이
좀 웃기긴 하지만 그 둘의 연결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손꼽힌다.
난 그녀에게 남편을 연결해 주었고
그녀은 나에게 ‘남편 외 모든 것’을 연결해 주었다.
이렇게 당근 마켓이 유행하기 전에 그녀는 열심히 무언가를 팔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이런 게 있는데 너도 한번 해봐” 말한 적 없었다.
다만 당근 마켓 거래 후
친구의 얼굴엔 항상 홀가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하고 존재’를 옆에 두는 것 같다.
친구 따라 당근 마켓을 시작하고
고여 있던 내 인생이 순환되기 시작했다.
요즘 집에 있는 물건을 처분하면서 그걸로 주식 산다고 했더니
친구가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몰랐어? 우리 집에 있던 가전 냉장고며 티브이며
그거다 우리 엄마가 주식해서 산거잖아”
세상에 친구 엄마가 주식계의 큰손이었다니!
순간, 친구 집 화려한 가전제품과 수많은 시디와 LP판이 스쳐지나갔다.
보통 가정집에서는 가지고 있기 힘든 스케일이었고
난 그런 걸 파는 사업을 하는 집인가 하고 추측했다.
그 시절에는 주식 거래자체도 힘들었다는데,
지방에선 서울에 있는 은행에 직접 가서 주식을 사야 했다던데.
그 이야기가 내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절 알고 지냈는데
왜 그 이야기를 지금 해?
아니 내가 물어본 적도 없지 참.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고
일상엔 어떤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지나고 보니 항상 내 인생에서 쐐기를 박는 말을 했던 그녀였다.
샤넬백이 사고 싶었을 때 내가 고민하자
“어차피 살 거, 빨리 사서 한 번이라도 더 들어야지 ”
‘한 번이라도 더’ 바람직한 태도다.
이 말에 꽂혀서 바로 샤넬백을 질렀다.
근데 이런 띵언을 하는 그녀는 정작 샤넬 백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난 그런 거 없어도 행복해 이런 표정이었다.
그 이유가 내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한국에서 커리어우먼이 명품 백 없이 살아가는다는 게 가능한가?
그 친구는 가능했다.
키티 버니 포니 아니면 무인양품의 심플한 에코백이 친구의 가방이었다.
아, 취향이 확고해서 명품 같은 건 안 드는 건가?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생활을 책임지는 진짜 어른이 된 기분,
30대 초반쯤 누구나 명품병을 한 번씩은 앓는 것 같다.
사람에 치여서 사람에게 기대기도 싫다.
친구 가족 연인 대신 명품백 만이 나를 위로해 주는 느낌
뭔가 성취하고 싶은데 그게 바로 눈으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
‘지금 이대로 잘하고 있다’라는 셀프 응원,
내 성취의 중간정산이 명품백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이 지점이다. 명품백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 게.
내 중간정산의 형태가 바뀌었다.
명품백에서 여행으로
누군가에게는 그게 와인이 되고, 테니스가 되고, 자전거가 된다.
드디어 내 미스터리가 풀렸다.
애초에 이 친구의 중간정산 형태는 처음부터 여행이었다.
취준생 시절 여행 때문에 면접 날짜를 바꾸는 사람이 이 친구였다.
샤넬백을 팔던 날,
"제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고 90도로 인사할 뻔했다.
그만큼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물건이다.
그 당시엔 외모만을 위한 겉멋이 필요했다.
지금은 영혼을 위한 겉멋만이 필요하다.
그때 산 샤넬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미쳤니? 니 월급보다 비싼 가방 들고 다니고”
별것 아닌 선배 말이 내내 맘 속 깊이 남았다.
그때 저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왠지 다른 길을 갈 것을 예감했다.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명품백을 열심히 돌려가며 다니는 후배들을 보면 엄마미소가 지어진다.
셀프 응원을 잘하고 있구나 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언니, 명품백 사고 싶은 거 어떻게 참아야 해요?”
그걸 왜 참아? 그 좋은걸!
사고 싶은 걸 사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세요!
돈 모으는 큰 계획을 세우기보다
눈앞에 급급한 물욕에 진심으로 빠져보길 바라
그 짜릿한 황홀감은 쉽게 오지 않고
만약 오더라도 아주 잠깐이라
그 감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
아니 꼭 역이용하길 바라
그걸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명품 백에 미쳐 눈 돌아가는 시절을 통과했다.
그런 물욕이 내게 찾아온다는 건 행운이고
다시 한번 무언가가 사고 싶어 안달이나 미치는
감각에 휩싸여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