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만 있으면 우린 많은 것을 이겨 낼 수 있다

커피머신 -> 스타벅스

by 보리차

“왕꽁꽁, 왜 물에 방구가 들어있어?”

탄산수를 처음 마셔 본 조카가 말했다.

조카는 나를 꽁꽁이라고 부른다.

고모를 꽁꽁으로, 그중에서도 나는 큰고모라서 왕꽁꽁이다.


지난번 만날 때 내가 선물한 티셔츠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우리 사이는 본격적으로 멀어졌다.

아니 그걸로 우리 사이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큰 맘먹고 산 건데, 바로 환불했고

더 이상 조카에게 뽀뽀 구걸 따위 하지 말자!

다시는 조카에게 지갑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 참 일이 바빠서 집에 조카가 다녀가도 우린 만나지 못했다.

가습기에 물을 채우려 무심코 뚜껑을 열었는데

물통과 겉면 틈 사이에 조카가 남기고 간 오렌지 한 조각이 있다.

순간 샤르르 내 마음에서 무언가가 녹았다.

거기엔 분명 아무런 말도 없는데

왜 그 새콤달콤한 오렌지 향에 기분이 좋아지는 거지?

오렌지 뽀뽀를 받은 느낌이다.


가끔 조카는 내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왕꽁꽁 빨리 와, 내가 커피 타 줄게”

조카는 요즘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캡슐커피 놀이에 한참 빠져 있다.

커피 타 준다는 말.

그 말 끝에 살짝 힘을 빼서 말할 줄 아는 그런 조카는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할까?


그랬던 조카가 지금은 핸드드립으로 내게 커피를 내려준다.

꼬맹이의 달큰한 땜내와 커피향이 섞인다.

짭조름 하면서 고소하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다.

아직은 어른의 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진다.

기계가 내려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핸드드립이란 어쩔 수 없이 내려주는 사람의 인간성이 담길 수 밖에 없다.

종이필터부터 적시는 건 어떻게 알았지?

유튜브 세대인 조카는 모든 걸 유튜브로 배운다.

어린이들에겐 커피 금지인데, 어떻게 이 맛을 만들지? 미스터리다.

똥기저귀 갈아 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꼬맹이가 자라서 커피를 내린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거지?

믹스커피 타던 막내 작가에서 그걸 10000잔쯤 타고나니 메인작가가 되었다.

그 중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커피 한잔이 있다.


외계인이 만약 지구에 와서 무언가를 맛본다면

편집실 믹스커피를 알려주고 싶다.


좁고 먼지로 가득하다.

햇빛도 닿지 않는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나른하다.

나가고 싶은데 앉아 있어야만 한다.

언제 나갈지 모른다.

88 올림픽 때 지어진 이 건물, 그때 들어온 공기가 아직도 나가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더께들과 함께 뒹굴며 수많은 방송 완제품들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가편집 화면 속 폭설이 내리는 밭

눈을 걷어내면 거기엔 거짓말처럼 파릇한 배추가 있다.

얼어붙은 강을 깨뜨리면 그 안엔 미꾸라지가 파닥파닥 요동치고 있다.

온 세상이 분명 겨울왕국처럼 얼어붙어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명체가 살아 있는 걸까?


“이러고 들어가면 엄니가 옷 엉망으로 들어왔다고 야단쳤지”


온통 진흙 범벅이 된 할아버지는 계속 추억을 이야기한다.

거기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남자는 결국 평생 두 명의 여자를 추억하는 것 같다.

‘어머니와 아내’

사람은 모두가 늙고 나중엔 그 추억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테이프에 담긴 일상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엔딩이 할아버지가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씬이었다.


“귀가 한쪽 없는 딸이 태어났어요,

우리 식구가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어요 “


우리는 화면을 정지시키고 믹스커피를 탄다.

잠시, 마음의 쉼표가 필요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그 마음이 뭔지 모른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아직까지 각자의 가족을 꾸리지 않았던 우리는

자식이란 뭘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 한 줌의 먹먹함까지 섞어 믹스 커피를 홀짝거렸다.


“이 피디는 왜 결혼 안 해요?”

“돈이 없어요.”

“돈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와, 작가님 천재! 그러고 보니 진짜 그러네요.”

“사람 있을 때 해요”


그게 최고의 타이밍 아닌가?

믹스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내가 했던 그 어이없는 말이 생각이 난다.

내 앞가림도 잘 못하면서 남의 인생에는 어떻게 척척 그런 용기가 났는지


“언니 이사해”

“아우 그만둬”

“그냥 끝장을 내.”


그러고보니

거침없는 직언을 했던 날이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보통날들이었고

그 순간엔 늘 커피가 있었다.

친구가 양다리남이랑 계속 질척거릴 때에도

선배의 프로그램이 엎어져 작가를 관두려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아닌 날에 커피를 앞에 두고

나는 타인에게 직언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 말은 언젠가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왔고

고민의 갈래에 선 내 마음을 명중시켰다.

결국 나 자신에게 해주는 말이었다.


커피는 나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리추얼이었다.


사사삭

얼음을 넣고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자신의 속을 훤히 다 내비추고 있는

6각형의 얼음은 그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녹아버린다. 각자가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만나 새로운 것이 된다.


오늘도 오늘의 커피를 마신다.

아메리카노야 말로 매일 매일 다른 맛이며

날씨, 장소, 내 기분,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마스크 모양에 따라서도 맛이 너무도 달라진다.

그 디테일함을 본격적으로 만끽하고 싶다.


커피를 내손으로 내리는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함께 빚어내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커피 한잔만 있으면

우린 많은 것을 이겨낼 수 있다.

용기를 장전하는 감각에 집중하고 싶다.

어쩌면 내겐 완성된 커피가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여유가 필요 했던 거다.

뜨거운 물이 커피콩으로 스며드는 순간의 생글거림.

어쩔 수 없이 힘이 불끈 치솟는 순간.

잠깐만 좀 비켜주시겠어요?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런 출처 없는 자신감이 생겨나버리는 요상한 순간.

커피 내리는 시간을 확보하고 다시 핸드드립으로 돌아가자.


아침에 혼자서 마시는 커피

비 내리는 날에는 비 맛이 나고

구름낀 날에는 구름 맛이 나고

눈 오는 날에는 눈 맛이 나고

맑게 갠 날에는 환한 햇살 맛이 나고

오직 그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살고 있는 기분

-에쿠니 가오리<제비꽃 설탕 절임> 중에서-


브레빌 커피머신을 팔아 스타벅스 주식을 산다.

왜 스타벅스냐고?

친구는 스타벅스가 나쁘다고 했다.

스타벅스는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한 많은 커피숍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커피 한 잔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뼈를 깎는 습작을 만드는 공간이다.

그곳은 스타벅스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커피머신 새 주인에게-


가끔 커피가 설사를 하는 날이 있어요

압력이 올라가지도 않은 채 커피가 묽게 나와요

그걸 브레빌 유저들 사이에선 커피퍽이라고 하는데

이런 날을 그냥 커피를 하루 쉬는 것도 좋아요.

제가 해보니까 다음날 커피가 더 맛있어지더라고요.


하와이 코나와 솔티드 캐러멜 원두를

섞어 먹는 걸 좋아했어요.

궁금한 원두가 생겨서 시애틀도 날아가 보았고요.

재밌는 원두와 많이 만나보시고 새로운 조합도 해보세요.


저처럼 한 시절 정도는

가산을 커피에 탕진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전 05화눈앞에 급급한 물욕을 소중히 여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