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잠재적 해방 일지
담배 앞에서 괴물이 되는 나
“그냥 이빨을 포기해”
같은 말인데 폭죽이 터져 버릴 때가 있다.
지난번에도 들었던 친구의 한마디가 이번엔 나를 찢어 놓았다.
친구도 이제 들어주기가 지겨울만한 남편 담배에 대한 내 타령이 또 시작됐다.
임플란트 재수술을 하는 주제에 담배를 못 끊는 위대한 담배 중독과 나는 살아가고 있다.
담배 앞에서는 자꾸만 내가 괴물이 되었고 때로는 치욕스러웠다.
잇몸을 찢고 넣은 쇳조각을 다시 꺼내는 일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인간이라니, 정말 치가 떨린다.
별것도 아닌 맥도널드 쿠폰을 그렇게 정성스레 보관하고 제때 쓰려 안간힘을 쓰지만
담배로 인한 인생 전체의 손실은 관심조차 없는 인간이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나는 서서히 썩어가는 것 같았다.
이런 재수술을 하는 사람도 흔치 않지만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인간은 남편뿐일 듯싶다.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벌써 3년째 이러고 있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앞니 없는 맹구를 이상하게 여겼다.
한 번은 이모가 찾아와서 돈 때문에 못하는 거냐며
자기가 돈을 내줄 테니 이빨부터 하라며 돈쭐을 내놓고 갔다.
담배 끊으라 닦달하던 나를 보며 비웃던 이모였다.
"끊으라고 하면 더 안 끊어."
그런 이모는 담배 때문에 이빨을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이번에도 임플란트를 넣더라도 다시 빼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왜냐 남편은 담배를 못 끊을 테니까
아니 이건 지나가는 동네 강아지도 알 거다.
병원에서는 돈 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담배 못 끊는 호구 환자들은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담배 앞에서 병신이 되는 남편
담배냄새보다 더 싫은 건 담배 앞에서 병신이 되는 나약함이었다.
그 나약함이 내게도 전염되는 것 같았고
입으로는 끊는다 하고 손으로는 피는 그 이중적 찌질함이 나를 미치게 했다.
친구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약 먹는 다른 친구의 남편을 이야기하면서
약 때문에 자주 쓰러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약을 바꿀 때마다 일상이 깨지고 그 이력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은 지옥 그 자체라 했다.
“그냥 정신과 약 대신이라 생각해라”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에 결정을 내렸다.
밥 프록터가 말하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인간이 달에 갈 수 있었던 건 달에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듯이
나는 건강한 정신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담배를 선택했다.
담배 중독 쭈구리가 되어도 인생은 살아가야 하니까
예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친구와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 대화가 눈부신 빛으로 다가왔다.
너무 어두운데 한줄기 빛이 들어와 그쪽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친구는 정신건강을 위해서 그냥 육체적 건강을 포기하자 했다.
우리 둘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 직업에서 멀어진 상실감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정신적 건강이 육체적 건강을 압도한다는 걸 체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무가 정신이고 숲이 육체인 줄 알았다면
지금은 숲이 정신이고 나무가 육체다.
그만큼 정신이 모든 것이고 전부다.
담배도 좋은 점이 있네
“그냥 이빨을 포기해”
“안 그래도 그냥 임플란트 대신 틀니 하라고 했어.”
나는 용기를 내어 담배의 장점을 검색해 봤다.
담배를 변호하는 날이 다 오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뇌가 활성화되고 의욕이 생긴다.
짧은 순간이지만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
니코틴은 뇌의 의지를 주관하는 부분을 활성화시키는 성질이 있어
기분이 고무되고 의욕이 발생한다.
놀라웠다. 세상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장점이 있다니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어쩌면 남편은 담배를 피기에
나의 정리 안 하는 방을 참고 넘기고, 알아서 정리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엉망진창인 부분까지 보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담배 피우는 남편일지라도 추앙하고 싶어졌다.
(*추앙: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 나와 화제가 된 말로
영웅처럼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는 뜻인데 서로 응원한다는 개념이 더 가깝다)
나의 해방 일지 리스트
오늘부로 남편은 나의 금연 푸시로부터 해방됐다.
남편의 해방보다 나 자신의 해방이 더 크게 실감됐다.
나는 담배가 우리의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해방됐다.
그렇게 하찮았던 담배가 요상하게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담배는 남편의 육체적 건강을 망치러 온 정신적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기 같을 것 일수도 있다.
집에 숨겨둔 담배들도 다 꺼내 해방시켰다.
그동안 몰래 담배들을 숨기느라 지쳤었다.
포기할 때 상쾌해지는 이 감촉이 이런 걸까?
내 안에 들러붙어서 절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무언가가
내게서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무언가 배우는데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해방시키는 건 돈이 아니라 나의 관점이었다.
생각의 각도를 다르게 틀어 보면 해방되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았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순간들이 날 자유롭게 만들었다.
당장 나의 해방 일지를 만들어서 리스트를 적었다.
잠재적이라도 좋으니 내가 해방되고 싶은 것들을 써 보았다.
내 생각을 바꾸면 해방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체크했다.
나를 바꾸는 아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가능한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