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Apr 25. 2022

거창한 여행 말고 그때그때 작은 여행

흑자두타르트

아침에 들은 말이 하루가 된다.

“어디서 오는 거야?”

아침이 밝아 침대로 들어온 남편에게 물었다.

도깨비처럼 1층 거실에서 놀다가 혹은 서재에서 선잠을 자다 아침에서야 제대로 잔다.

“별에서 왔어”

"오빠가 도민준이야?"

이게 뭐라고 난 또 웃겨서 빵 터진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남편을 와락 안으며

“나 도서관 갔다 올게.”

스프링 피크(봄 우울증)의 절정기에 달한 나는 솔직히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다.

“아냐 오늘은 안 가도 돼. 도서관에서 전화 왔어”

“뭐라고?”

“너 너무 많이 온다고. “

“하하하하하”

아침에 듣는 소리가 내 하루가 된다.

그래서 항상 아침엔 조심해야 한다.

집어 드는 책, 무심코 튼 음악, 뉴스, 남편의 말 모든 걸 조심해야 한다.

그 말이 저주라면 진짜 저주에 걸리게 된다.

남편의 말에 도서관을 땡땡이치고 하루쯤은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었다.

아차 그런데 레디쉬가 날 침대 밖으로 꺼냈다.

시애틀 수산물시장에서 사 온 레디쉬를 꺼내 피클을 만든다.

빨갛고 탐스러운 레디쉬를 꺼내 씻고 자르는 동안에 요상한 기운이 생겼다.

피클이 익으면 골뱅이 파스타랑 잘 어울리 것 같았다.

아몬드 크로와상만큼 보고 싶어

거창한 여행 말고 그때그때 작은 여행을 하는 게 좋다.

늘 그렇듯 여행지에선 늦잠꾸러기 남편을 두고 혼자 호텔 주변 산책을 한다.

시애틀은 여러 번 왔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렘 같은 건 없었다.

그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찾고 싶어 안 가본 곳을 검색했다.

수산물시장 앞 스타벅스 1호점이 유명해 거기만 관광객이 몰리지만

사실 그 옆에 정말 맛있는 프랑스 빵집엔 지역주민들이 몰린다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빵집에 왔지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화려한 타르트와 마카롱이 맛있어 보였지만 아몬드 크로와상과 커피를 주문했다.

거기서 인생 커피와 인생 크로와상을 만났다.

그냥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충분했다.

인스타에 그 사진을 올렸더니 선배 언니가

 “아몬드 크로와상만큼 보고 싶어”라는 리플을 달았다.

그 순간 우리의 소울이 통해버렸다.

언제가 언니가 날 보러 오면 꼭 여기서 아침을 먹고 싶다.

눈앞에는 수산물시장 오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예전엔 여행 가면 아침 카페 두 탕이 가능했는데

더 이상 이젠 아침에 커피 두 잔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잔이면 충분하고 여기서 더 마시면 이 커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잔을 마시되 최고로 마시자고 생각했다.

커피가 내 입에 착 붙어 유심히 봤더니 엄브리아 라는 커피 브랜드였다.

시애틀을 기반으로 하는데 포틀랜드에도 매장이 하나 있어 나중에 다시 들려보려고 체크해 두었다.


작은 여행에서 식재료 고르는 재미

아직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기 이른 시간이라 동네 주민들로 북적였다.

어느 가게가 부지런한지 자연스레 티가 났다.

조금 일찍 연 가게는 나 같은 사람들로 오픈전 찬스를 누렸다.

오래된 채소 가게에서 레디쉬와 흑자두를 샀다.

흑자두를 집어 들었을 때 그 탱글 거림과 부드러움이 자꾸 만지고 싶게 만들었다.

가게 안쪽에는 가게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진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 가게의 미친 존재감은 에코백이었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캐릭터로 그려진 에코백이라니 굿즈까지 완벽했다.

과일들이 너무 예뻐서 어떤 명품 가게 구경보다 신이 났다.

돌아와 가방을 열어보니 난리가 났다.

흑자두를 싼 종이가 짓눌러지는 바람에

 <애플 타르트를 구워 갈까 해> 책이 흑자두즙으로 망가졌다.

처음엔 와인 빛이더니 점점 검보라로 변했다.

외계인의 메시지 같은 신비한 자국이 남아버렸다.

아마도 앞으로 더 아끼는 책이 될 것 같다.

흑자두가 우리의 만남을 잊지 말라는 듯이 흔적이 남겼다.

순간 일본에 잠시 살 때 친구가 놀러 왔던 기억이 났다.

친구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는데 그때 무릎에 생각보다 큰 상처가 나버렸다.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던 친구에게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흉터가 생겼나 봐” 하고 의미부여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시절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던 여름밤이 었다.

언젠가 그 친구를 만나면 그 무릎을 만져보고 싶다.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그 무릎이 깨질때만 해도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소개해준 남자와 그 친구가 결혼하게 될지 부터

많은 것들을…


흑자두향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짓눌린 흑자두를 씻어 한입 베어 물었다.

뿜어져 나오는 과즙이 그 어떤 과일보다 싱그럽고 진했다.

거기서 진동하는 향에 취해버렸다.

르 라보에서 <어나더 13>이라는 향수를 사서 좋아하던 그때보다 더 설레었다.

흑자두의 풍미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흑자두는 내가 여태껏 봤던 그냥 빨간 자두랑 뭔가 달랐다.

찾아보니 흑자두는 바이오체리라 불리는데 자두와 체리의 교배종이라고 한다.

아 그래서 향이 이렇게 달콤하면서도 새콤하구나

벌레에 강해서 농약 없이도 잘 자라고

붉은색일 때는 자두 맛이 강하고 검은색 일 때는 체리맛이 강하다고 한다.

멜라토닌 성분이 있어 불면증에도 면역력, 눈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흑자두술도 담근다고 하니 샹그리아만들 때 딱일 것 같다.

돌아가면 흑자두 타르트를 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트코에서 흑자두를 샀는데 시애틀 수산물시장에서 파는 맛의 반도 못 따라갔다.

그래도 흑자두와 나의 만남을 거나하게 기념하기 위해 구웠다. 내 인생에 흑자두가 들어 온 순간은 도넛복숭아만큼이나 중요하다.

과일 타르트 레시피는 많은데 자두 타르트 레시피는 생각보다 없었다.

그냥 타르트 틀에 자두와 설탕만 채우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 자주 보는 브이로그에서 집에 굴러다니는 과일로 타르트를 만들길래 그걸 보고 응용해 봤다.

타르트를 처음 구워보는 주제에 레시피를 응용했다.

커스터드를 중간에 채워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커스터드 크림을 만드는데 이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지 몰랐다.

이번에도 레시피대로 만들기는 실패했고 맛을 보장할 수 없지만 그런 모험이 즐거웠다.

작은 여행에서 산 식재료로 일상을 채워가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거창하게 멀고 긴 여행 말고 사온 식재료로 그 여행을 다시 추억할 정도의 여행이 좋다.

흑자두의 생글거림이 일상에 묻어나듯이

여행지에서 산 식재료는 그곳의 기운을 같이 데리고 온다.

골뱅이 파스타를 먹을 때 레디쉬 피클을 곁들인다.

이 한통을 다 먹을 때쯤이면 또 우리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여행을 다니기 위해 결혼 한 건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모험 동반자!

작가의 이전글 내 감정에 이름이 생겼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