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엔 없을 줄 알았지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동생의 별명은 여러 개였다. 그중 하나가 똥대 였다.
(똥대: 똥만 봐도 크게 될 아이)
어릴 때부터 왕왕 변기를 막았고 그건 아빠가 뚫었다.
“그래 니 똥 굵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시절엔 변기를 뚫는 게 왠지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늘 궁금했다.
같이 먹고 같이 싸는데, 왜 한 사람에게 만 저런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게 영원한 남일 같았다.
어서 와~변기 전쟁은 처음이지?
미국은 의료 지옥 말고 하나의 지옥이 더 있는데 그건 변기 지옥이다.
수압도 낮은 대다가 구멍도 작다.
그건 어지간히 참겠는데
물에 석회가 많아서 그런지 누렇게 변하는 건 진짜 죽을 맛이다.
더럽고, 무섭고, 집에 가고 싶다.
진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깟 변기 때문에 한국으로 간다고?
아니 내게 있어서 변기는 그깟이 아니라 내 인생의 모든 것이다.
나란 인간은 청소 정리정돈은 안 하지만 유일하게 변기는 깨끗하게 닦는다.
신이 머무는 신성한 곳이기에 최선을 다한다.
다들 우리 집에 오면 방은 노다메가 울고 갈 엉망진창인데
변기는 호텔처럼 깨끗하다며 놀라곤 했다.
내가 얼마나 깨끗한 변기에 진심이냐면
구제불능 미국 변기를 닦기 위해 모든 세제를 다 써봤다.
쌔가 빠지게 해 봤자 미국 변기 닦기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파랗게 물이 변하는 것도 써봤지만 뭔가 문제를 덮는 것 같아 싫었다.
그걸 쓰는 내내 내 자신이 버려진 변기가 된 것처럼 괴로웠다.
더러운 변기에 내 감정이 얽매여 버렸다.
돈 낭비 시간낭비 산전수전 다 겪고 깨달은 건
미국 변기가 닦이는 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 없다는 거였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변기 닦기 달인이 쓴다는 마법 세제를 봤다.
일본에서 직구한 검스라는 세제가 있는데 그것만이 유일하게 닦였다.
게다가 나는 변기 뚜껑 닫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열어두면 더러운 기운이 집에 들어오는 것만 같아 불결하다.
누렁이(=남편)가 가끔 변기 뚜껑을 열어 놓으면 나는 미친개처럼 광분한다.
그렇게 나는 미국 변기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결혼생활 최대 위기를 마주하다
몇 주 전 누렁이가 자기 화장실 변기가 막혔다면서 아마존에 뭔가를 주문했다.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갔나 보다.
“작작 좀 싸지.”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누렁이를 놀려댔다.
미국 변기는 절대 휴지를 안에 넣으면 안 된다고 훈수까지 뒀다.
미국에서 고작 1년 산 사람이지만 30년 산 사람에게 당당하게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원인을 추궁했다.
“물티슈를 넣어서 그래.”
그런데 오늘 아침 내게도 똑같은 참사가 일어났다.
역시 인간은 까불다가 똑같은 꼴을 당하도록 하느님이 디자인하셨나 보다.
뭔가에 홀린 듯 그만 휴지를 과도하게 버렸고,
스위치를 누를 때 뭔가 묵직하면서 둔한 움직임,
그 쌔함은 역시나 틀린 적이 없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물,
그걸 우짜 둔 둥 무마해 보겠다고 어리석은 손은 한번 더 스위치를 누르며 닦달한다.
변기는 보란 듯이 갑자기 콸콸콸 토해내며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다.
망했다.
일단 넘친 걸 닦고 수습을 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누렁이에게 이 사실을 이실직고하려니 그렇다.
내가 너무 우스운 꼬라지가 된다.
오랫동안 두고두고 사골뼈처럼 우려먹을 재료를 자진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아무리 더러운 꼴 다 보여 줬더래도 이건 마지막 자존심! 내 마지노선이었다.
그것만은 보여주고 싶지... 안..... 무조건 지켜야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누렁이가 내겐 남자로 보여서가 아니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다.
만약 사태가 커져 사람을 불러 변기를 뜯어야 하면... 헉!!! 일단 쭈구리가 되기로 했다.
누렁이는 뚫어뻥을 가져가더니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나는 보고야 말았다.
신이 나서 누렁이의 입꼬리 각도가 15도 올라간 것을.
난 그 참사 현장을 도저히 두 눈 뜨고 못 볼 거 같아서 1층으로 피신했다.
목조건물이라 물소리가 더 요란하다. 마치 용트림을 하듯 거대한 소리가 났다.
“현진아 물 넘쳐! 얼른 와서 닦아.”
난 그 순간도 현실 부정을 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 어
결혼생활 최대위기가 나를 덮쳤다.
얼굴이 흑빛으로 변한 내가 뛰쳐 올라 가보니... 대반전!
변기는 고요하게 평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 당했네!
같은 패턴으로 놀리는 누렁이도 놀라운데 똑같이 당하는 나란 인간도 어지간 허다!
그 와중에 내게 요상한 상쾌함 찾아왔다.
내내 축축하다가 뽀송한 햇빛이 드리운 순간이었다.
상대의 변기를 뚫어 준다는 것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여러 번 큰 위기가 있었다.
한밤중에 워시 세일 세금 폭탄을 맞아 부둥켜안고 울던 일
비 오던 밤 혼자 주차하다 앞 범퍼 주저앉아버린 일
기타 등등 그때마다 전우애를 느꼈지만
이 변기 전쟁이야 말로 전혀 다른 차원의 전우애다.
변기가 뚫리자 내 인생이 뚫리는 것 같았다.
진짜 우정은 상대가 변기를 뚫어 줄 때 생겨나는 것 같다.
이 단단한 우정이 생기고서야 진정한 우리 결혼생활이 시작된 거 같았다.
진짜 핏줄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해선 하기 힘든 일이다.
어릴 때 아빠가 변기를 뚫어주면 동생이 아마 이런 기분이었을까?
말로는 설명조차 안 되는 편안한 안도감.
내 인생은, 내 손으로
그런데 누렁이의 ‘뭔가 자기가 엄청난 걸 해냈다는 그 재수 없는 표정’
꼴사 나와서 못 보겠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뚫어뻥을 배웠다.
배워 두지 않으면 평생 거만한 누렁이의 지배하에 살아야 한다.
나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또 기회를 잡아챈 누렁이의 비웃음과 놀림을 당해야 한다.
그 치욕은 다신 겪고 싶지 않다.
아까 다운타운에 갔을 때 주차 티켓을 뽑으려는데 라이선스 플래이트를 입력하라 했다.
뭔지 몰라 길 가던 사람에게 물었다.
그건 차에 있는 거라고 했다.
아, 라이선스니까 면허증에 있는 번호인가 싶어서 그걸 입력하려는데 아니었다.
뒤에 줄 서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니 차 뒤에 붙은 거라고 했다.
바보, 그건 차번호를 입력하라는 거였다.
그 순간은 어이가 없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요상한 쾌감이 들었다.
그동안 매번 누렁이가 다 해줬기에 나는 알 필요도 없었고 전혀 몰랐던 거다.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순간 다짐했다.
모든 건 내 손으로 하자!
참 신기하게도 그동안 맛있는 거 검색할 때, 맛있는 거 구경할 때, 맛있는 거 먹을 때가
대부분 즉각적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때야 말로 내 뇌에서 엔도르핀이 흥청망청 분비되는 것 같다.
아마 누렁이의 입꼬리가 15도 올라가던 순간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42년 만에 뚫어뻥을 마스터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