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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Oct 08. 2021

자기만의 우주

feat. 소유냐 존재냐

샌프란 사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톡이 왔다.

남편이 로렉스 시계를 사려는데 포틀랜드 간 김에 살지

면세점에서 살지가 고민이란다.

포틀랜드는 소비세가 없어 쇼핑천국이다.

그런데 막상 포틀랜드에 살아보니 ‘물욕’이 사라지는 게 아이러니다.


“너네 남편은 로렉스 안 사?.”

친구가 그런 거 안 사는 남편이라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아니 아니 난 아니다.

남편이 물욕이 충만하고, 사고 싶어 안달 난 게 있어서

가격 비교하고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 고민하고 동동거렸으면 좋겠다.

취향이 확고해서 어떤 힘들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우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딴 걸 왜 사”라고 말하는 남편에겐 로렉스는 그냥 고철덩어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로렉스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사주는 아이워치도 처박아 두고 차지 않는다.

내겐 너무 거추장스럽다.

그냥 아무것도 차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편하다.

나도 모르게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졌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첫째, 긴 기다림이 가짜를 걸러낸다.

서울에선 스트레스받으면 즉각 쇼핑 창을 켜서 결재를 했다.

바로 다음날 나의 물욕을 지체 없이 채웠고

이 ‘서울 빠르기’가 내 쇼핑중독을 가속시켰다.

무언가에 굶주렸지만 그건 분명 물건은 아니었고

그걸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았다.

포틀랜드에 와서는 물건을 주문하고 다음날 손에 넣는

즉각적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최근엔 아마존 배송이 더 느려져서

프라임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다가 나자빠진다.

며칠 지나 보면 지쳐서 진짜 이게 필요한 건 지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되묻게 된다.

그렇게 취소시킨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

배송속도가 느려질수록 기다림이 커질수록

자연스럽게 소유로부터 멀어졌다.


둘째, 소유보다 존재의 기쁨을 알게 됐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는 것보다

내 몸이 확실한 피드백을 줬다.

내겐 지금 두 개의 기다림이 있다. 가방과 콘서트.

마크 제이콥스의 운동가방을 주문했을 땐 그저 그랬다.

그런데 어젯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오케스트라 콘서트> 표를 예매했을 때

신나서 잠을 설쳤다.

오레곤 오케스트라 인스타에 들어가서 트레일러도 찾아보고

콘서트장의 위치도 체크하고 백신증명서랑 여권도 챙겨뒀다.

가장 좋은 자리표 가격보다 물론 가방이 더 비싸다.

그런데 내게 주는 행복은 콘서트 티켓이 더 크다.

물건을 샀을 때의 설렘이 닫힌 거라면

경험을 예매했을 때 설렘은 무한대로 열려있다.

물건을 사면 내가 소모되는 기분이지만

경험을 하면 내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예전엔 물건으로 나를 증명하려 했다면

지금은 '내 존재를 통과한 경험'으로 나를 증명하고자 한다.


가방과 콘서트, 너무 다른 결의 기다림

셋째, 나의 세계는 내손으로 고른다.

남편이 처음 데려간 단골 한식집에서

사장님이 나를 처음 보고한 말이 충격이었다.

“어머 가방도 명품 안 들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뒤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명품가방을 안 들어서

다행이라는 뉘앙스였다.

명품가방을 멋지게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취향을 존중한다.

명품을 들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지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판단하는 게 싫었다.

그날로 거기 발길을 끊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고 왠지 무시당한 거 같아서

에르메스 가방을 빌려서라도 다시 거길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에 휘둘리는 천둥벌거숭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있는 세계를 내가 고른다.

물건을 자랑할 일도 없고

물건으로 사람을 판단당 할 일도 없는 세계만이 내가 있을 곳이다.

그 세계에서 나만의 호방함을 갈고닦고

나만의 우주를 계속 확장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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