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된 내 속마음
친정식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으며 술 한잔할 때
엄마가 남편에게 날 가리키며
"다 똑같이 예쁘지만 얜 나한테 제일 착한 딸이야"라고 말할 때
나는 사실 마음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
나는 딸딸아들 삼 남매 중 맏이다.
나를 낳고 한동안 임신이 안되던 엄마는 4년 만에 여동생을 낳았다.
둘째 임신이 하도 어려웠고 또 모유수유 중이라
셋째는 딱히 기대도 안 했다는데
이상하게 태동이 느껴져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었단다.
그렇게 연년생으로 여동생, 남동생이 생겼다.
딸딸아들이라고 하면
남동생이 엄청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을 거라고 주변에서는 생각하지만
엄마는 세 자녀에게 모두에게 골고루 애정을 주셨고
무심한 성격인 아빠는 세 자녀에게 모두 무관심했다.(슬프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래서 다행히 셋 다 "엄만 누굴 편애해"라는 자격지심은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맡은 역할들이 있기에
나는 맏이라 동생들에게 늘 양보하는 입장이었고
여동생은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끼여서 늘 자기 것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남동생은 주변에서 귀한 대접받았을 거란 오해를 오래 해명해왔고
요즘엔 연애라도 할라치면 사실 누나가 둘이나 있다는 슬픈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 한단다.
결혼 전에 친정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았을 땐
내가 가족 내에서 어떤 역할인지, 어떤 성격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혼하고 일정 거리가 생기고 나서야 우리 가족을, 가족 내의 나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실은 나는 착한 아이병에 걸린 K-장녀다.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가족들을 챙기면서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가족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가 높은 사람이다.
그렇게 가족들의 인정을 받는 게 행복하고 당연했는데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실 힘들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계속 양보하고 도움을 주는 장녀의 자리가.
내 이름 마지막 글자는 선이다.
착할 선
착한 딸 역할이 버거워졌는 데다가
이름이 성명학상 안 좋다기에
고민 끝에 이름 한자 의미를 바꾸는 개명을 했다.
삼십 년 넘게 불려 온 이름 자체를 바꿀 용기는 없었고
한자만이라도 바꿨다. 착할 선에서 고울 선으로.
좀 더 진취적인 의미의 한자로 바꾸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작명소에서 이게 최선이란다.
이제 나는 진짜 착한 사람 말고
진짜 고운 사람이 되겠다.(이렇게 마음먹으면 얼굴이 예뻐지나? 하하...)
K-장녀의 롤이 무겁다고, 싫다고 하지만
단번에 벗어낼 수는 없다.
그저 엄마한테 안 하던 투정도 해보고 잔소리도 해보고
좀 더 솔직한 내 마음을 드러내 보고 있다.
엄마 사실 나 착한 딸 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