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과를 안 주셨지만 감사합니다.

회사 밖을 꿈꾸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by 배부른기린

입사 3년 차 고과 면담 때 일이다.


부장님과의 면담 시간은 보통 5분 남짓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30분 넘는 면담을 가졌다. 상위 고과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기본 고과였다. 화를 억누르며 조목조목 따졌다. 10년 조금 넘는 회사 생활 동안 고과 면담 때 날을 세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해는 야근이 많았다. 무게감 있는 업무를 맡았다. 업무가 손에 익숙해진 때라 어려움 없이, 투덜거림 없이 업무를 했다. 출장도 잦아 많은 시간을 일을 하며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회사 생활 동안 야근비가 가장 많았던 해 중 하나다.


어느 부서, 어느 조직에나 똘아이 보존의 법칙이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 부서는 그 법칙을 초과했다. 실험실에서 몰래 누워 자는 책임, 하극상하는 선배, 5차원에 사는 노총각 책임 등 파트장의 지시가 먹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말 잘 듣고, 토 달지 않는 직원에게 일이 몰리게 되었다. 내가 그중 한 명이었다. 업무가 점점 목에 차기 시작했지만 조기 진급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라 불만은 크지 않았다. 도리어 기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연말 고과 시즌 면담에서 기본 고과를 통보받으며 폭발하게 된 것이다.


날을 세웠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파트장은 고과 돌려먹기의 관행을 따르는 분이었다. 그 해에도 본인이 생각해 둔 차례의 사람이 가져갔다. 그렇게 현실을 깨달았다.


이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일 뿐, 진급과 고과에 대한 욕심은 조금도 없었다. 이듬해부터 고과 면담은 2분 안에 끝났다. 싸울 의지도 없었다.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3년 뒤, 내 차례라 생각하는 해가 왔다. 역시 일을 적당히 했다. 어차피 내가 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고과를 받았다. 받은 고과를 레버리지로 이듬해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평범하게 진급했다. 지금은 드문드문 고과 챙겨 먹는 직원 나부랭이로 살고 있다.


회사 생활 초기에 성과와 보상의 불공정을 겪은 것이 이후 회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변명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어필 잘하며, 할 말 하는 친구들은 좋은 고과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못 했다.


그렇다 한들 딱히 그들이 부럽지 않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에 목매지 않게 만들어준 파트장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지만, 내 목표대로 조기 진급을 하고 계속 회사의 주요 인력 풀에 들어갔다면 지금과 같이 투자와 사업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회사가 바빠졌다. 임원분들을 모시는 회의가 많다. 회의에 임원이 포함되면 실무자의 업무 강도는 두 배 이상이 된다. 두 달째 회의를 주관하며 이래저래 구르고 있다.


회사의 업무 강도는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끼친다. 업무 강도가 높으면 절대적인 시간도 아쉽지만, 사고와 사유를 할 수 있는 여유 또한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부동산 투자해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회사에 묶여 있어도 주식, 부동산 같은 자산들은 계속 일을 해준다. 시간을 먹고사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회사다. 회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배운 툴과 지식들을 사회생활하는 데 써먹고 있다. 또한 회사에 적을 두었기에 만들어진 나의 신용등급은

투자를 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된다.


업무가 조금 바쁘지만 그로 인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바쁜 와중에 짬 내서 즐기는 동료들과의 커피 한 잔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달콤한 월급의 마약은 말해봤자 입이 아프다.


지난 15년간 회사 내에서 나의 삶을 스케치해 왔다. 앞으로는 색칠을 해야 할 것인데, 당분간은 회사 내에서 색을 입혀 나갈 생각이다.


빨리 퇴사를 해야 한다는 목표는 없다. 최대한 회사에서 색을 칠해가며 그림을 그려볼까 한다.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지내야겠다.


출근 전 밤이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