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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ulddae Apr 12. 2024

팔 하나 없는 게 장애라면, 배려심 없는 것도. 장애.

"갑자기 가까이 가면 고양이 놀래. 고양이도 배려해줘야지."

요즘 아이는 한창 그림그리기에 심취해있다. 특히 내 스마트폰에 폰연필로 그리는 걸 좋아한다. 스케치북이 그릴때처럼 속도감있는 터치는 없지만, 오밀조밀, 그렸다 지웠다를 할 수 있어선지 선을 긋고서 자기 예상을 빗나가는 그림이 나오면 깔깔깔 웃어재낀다. 그 웃음이 좋아 그림 그린다 하면 나는 흔쾌히 스마트폰을 내준다. 다만 '엄마 나 미대갈래'라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스마트폰에 토끼, 하마, 코끼리, 기린을 그려주었더니 언제부터인가 펜을 잡은 자기 손을 엄마가 다시 잡고 그림을 그려달라 한다. 펜에도 아이 손까지 컨트롤해야 하니 나로써는 형태 그리기가 한결 더 힘들다. 그래도 그린다. 잘 그리던 못 그리던, 그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나도 아이가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요녀석이 '무엇'을 그리고싶어하는지 궁금해 되든말든 선을 긋는다. 그러다 요즘은 부쩍 '챙피한 걸 그려줘'라고 자주 말한다. 처음엔 "챙피한 거? 어떤거지. 엉덩이 보이는 거?" 라며 아이가 말하는 만화주인공을 홀딱 벗겨 엉덩이에, 배꼽에, 젖꼭지가 보이는 걸 그려줬다. 그럼 아이는 "아 챙피해~~~!"라며 너무너무 재밌어했다. 그래, 엉덩이란 말만 들어도 웃길 때지. 덕분에 나도 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소리내 깔깔깔 웃었다.


"엄마, 루시오 챙피한 거 그려줘."


그날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삐죽머리 남자 캐릭터를 그려줬다. (너무 선정적?이라 여기에는 자체 모자이크 버전을 올린다.)그런데도 아이는 '더, 더, 더 챙피한 거'를 주문한다.


"여기서 어떻게 더 챙피해? 아무 것도 안 입었는데?"

"그래도. 더 챙피한 거. 더더더더 더~~~~~챙피한 거 그려줘."


만화에선 언제나 용감하게 악당을 물리치는 유쾌한 남자주인공이 여기에선 기가 그리는 대로 한없이 창피해지는 걸 보고싶은 걸까. 의도를 알 수 없는 아이 질문에, 나는 '노출'보다 창피한 게 뭔지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세상 교육적인(?)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음..... 더 챙피한 건 이런 거지. 화난다고 남을 막 때리는 거, 밥 먹을 때 돌아다니면서 먹느라 밥을 다 흘리는 거, 사람들 다 있는 데서 큰 소리로 장난치고 뛰어다니는 거, 장난감 어지르고 안 치우는 거, 갖고싶은 장난감 안 사준다고 막 울고 떼쓰는 거, 남들 다 자는 깜깜 밤에 큰 소리로 떠드는 거, 자기 차례 아닌데 먼저 하려고 새치기 하는 거." "엄마 새치기가 뭐야?" "차례로 줄 서있는데, 늦게 왔으면서 저 앞에 서서 먼저 하려고 하는 거지." "나쁜 거네." "그치? 근데 이렇게 해놓고 다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사과 안 하는 게 제일 챙피한 거야."


저 말들을 하며 간단히 그런 상황들을 그렸다. 아이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 둥, 시시각각 새로 그어지는 선이 형태를 만드는 걸 눈으로 좇느라 바쁘다. 옷을 안 입어 속살이 보이는 것 만큼 창피한 짓이, 이런 거란 걸 아이는 이해했을까. 모르는 어른들도 많은데, 이제 세 살 아이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인지도 모른다. 배려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그저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옆에 같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없는 사람인 듯 대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는 데서 모든 배려가 나온다. 그 간단한 걸 모르는, 어쩌면 '잃어버린' 사람은 팔 하나 잃어버린 사람보다 주변에 더 많은 피해를 끼친다. 그 피해를 우리 아이가 입기 원하지 않듯,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먼저 가르치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부터, 배려심 없는 '장애인'이 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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