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지하에서 자라온 것들

by 상현달

새벽 5시, 굴삭기가 잠든 도시를 깨웠다.

강민수는 안전모를 고쳐 쓰며 씨랜드 옛 부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45년 전 대형 화재로 폐쇄된 곳이자, 그가 긴 시간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작점이었다.

그는 실험 10년 차에 ‘사회 적응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기억을 조작당한 채 이 세상에 보내졌다. 연구진들이 ‘실험체가 일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관찰하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35년간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살아온 그 자신도, 한때 그 지하 실험실에 갇혀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복합쇼핑몰 건설 프로젝트는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임무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 이 장소에서 그의 조작된 삶이 다시 뒤틀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이상하네요, 감리관님.”

굴삭기 기사 김현우가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뭐가 이상한데?”

“어제 저녁에 분명 장비들을 일렬로 세워뒀거든요. 그런데 이걸 보세요.”

민수가 고개를 들자 숨이 막혔다. 5대의 굴삭기와 3대의 덤프트럭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고대 의식을 치르기 위한 제단처럼, 누군가 밤새 정성스럽게 배열해둔 것 같았다.

“혹시 야간 작업이 있었어?”

“아뇨. 경비원도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고...”

민수는 장비들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원의 중심에는 어제 없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름 2미터 정도의 완벽한 원형 구멍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하에서 위로 뚫고 올라온 것처럼.

“이 구멍은 뭐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평한 땅이었는데.”

민수가 구멍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아래를 들여다봤다. 손전등을 켜자 10미터쯤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보였다. 이상했다. 굴삭기로 땅을 파지도 않았는데 이런 정교한 통로가 생길 리 없었다.

그때 바람이 구멍에서 불어 올라왔다. 하지만 그 바람에는 기괴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달콤한 솜사탕 냄새와 45년 된 탄 냄새가 뒤섞인, 시간이 정지된 듯한 역겨운 향기였다.

“냄새 맡아보세요.”

김현우가 코를 킁킁거렸다.

“솜사탕 냄새 같은데... 아니 잠깐, 뭔가 탄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민수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기억의 파편이 서서히 떠오르려 했다.

“온도계 가져와봐.”

김현우가 온도계를 가져왔다. 민수가 구멍 위에 대자 눈을 의심했다. 35도. 새벽 5시에 이런 온도가 나올 리 없었다.

“이상한데... 다른 곳도 재봐.”

구멍에서 5미터 떨어진 곳: 8도

10미터 떨어진 곳: 5도

15미터 떨어진 곳: 3도

“구멍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있어.”

민수가 중얼거렸을 때, 갑자기 그의 뇌리에 섬광같은 기억이 스쳤다. 지하 실험실의 차가운 벽,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회전목마.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소리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다른 것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저거 들려?”

김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웃음소리... 아이들이 웃는 소리...”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요?”

민수만 들리는 소리였다. 그 웃음소리는 구멍 아래에서 울려 올라오고 있었다. 45년 전 그가 들었던, 맑고 순수하지만 이제는 뒤틀린 증오로 가득 찬 아이들의 웃음이었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회전목마 음악이었다.

삐걱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느릿느릿한 멜로디가 지하에서 흘러나왔다. 45년 전 씨랜드에서 들었을 법한, 그 낡고 저주받은 회전목마 음악이었다.

“음악 소리 들려?”

김현우는 여전히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감리관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새하얗게 됐는데...”

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화면에 뜬 시간을 보고 얼어붙었다. 새벽 4시 15분. 그는 분명 새벽 5시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45년 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현우...”

민수가 고개를 돌렸을 때, 김현우는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굴삭기들만이 원형으로 서 있는 텅 빈 공간에 민수 혼자 서 있었다.

그때 구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45년간 기다려온, 복수의 시간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아저씨... 혼자예요?”

민수가 구멍을 내려다봤다. 10미터 아래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저씨도 우리랑 놀래요?”

더 많은 목소리들이 합류했다.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였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아기 같은 목소리까지.

“재밌는 놀이 알고 있어요.”

“어른을 아이로 만드는 놀이요.”

“아저씨도 여덟살이 되고 싶지 않아요?”

민수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는 구멍 가장자리에 주저앉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작된 기억들이 무너지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작은 눈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들에는 45년간 쌓인 외로움과 분노 그리고 뒤틀린 순수함이 담겨 있었다.

“아저씨, 내려와요.”

가장 또렷한 목소리가 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민수는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35년간 조작된 삶이 무너지면서 진짜 자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여덟살 아이였던 진짜 자신이.

“싫어요?”

목소리들이 조금씩 날카로워졌다.

“그럼 아저씨가 스스로 기억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우리는 참을성이 좋거든요.”

“45년 동안 기다렸으니까요.”

그때 민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 번호는 [알 수 없음]이었다.

민수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우리 이제 시작할까요?”

“뭘... 뭘 시작한다고?”

“진짜 놀이시간요. 35년간의 거짓 삶은 이제 끝났어요. 아저씨도 우리처럼 실험당했던 걸 기억해요?”

민수의 머릿속에서 억압되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하 실험실, 주사, 고문, 그리고 10년 후 기억을 조작당한 채 사회로 보내진 것.

“새로운 친구 만들기도 해야 해요. 아저씨 말고도 여기 일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민수는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몇 시간 후면 수십 명의 작업자들이 몰려올 것이었다.

“우리 혼자서는 외로워요. 친구들이 더 필요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도와주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민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무엇이 시작되려 하는지.

구멍에서는 여전히 회전목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음악에 다른 소리가 섞여 있었다.

땅 아래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기계음이 아니었다. 45년간 증오를 키워온 살아있는 복수의 소리였다.

민수가 차로 뛰어갔을 때, 백미러에 비친 건설 현장이 변해 있었다. 원형으로 배치된 굴삭기들이 회전목마처럼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리고 각 굴삭기의 조종석에 작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실루엣이었다.

민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차는 앞으로 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뒷좌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어디 가세요?”

민수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여덟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45년 전 옷을 입은 채로 앉아 있었다.

“우리 이제 친구잖아요.”

소녀가 웃었다. 너무나 순수하고 예쁜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45년간의 순수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민수는 이제 그 증오를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같은 증오를 품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