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45년을 기다린 아이

by 상현달

“놀라지 마세요.”

뒷좌석의 소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8세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늙은 느낌이 들었다.

“저는 김하늘이에요. 1980년 5월 25일에 여덟 살이었어요.”

민수의 손이 핸들 위에서 떨렸다. 1980년 5월 25일. 씨랜드 화재 당일이었다.

“그럼... 그럼 넌 죽은 거 아니야?”

“죽었죠. 그런데 죽지 않았어요.”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순수한 아이의 표정이었지만, 그 눈에는 45년의 세월이 고여 있었다.

“복잡해요.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차가 여전히 제자리에서 돌고 있었다. 민수는 시동을 끄려 했지만 열쇠가 빠지지 않았다.

“아저씨, 급할 것 없어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아요. 45년 동안 연습했거든요.”

하늘이는 작은 손으로 차창을 가리켰다. 창밖으로 건설 현장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풍경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현재의 모습이었고, 어떨 때는 45년 전 놀이공원의 모습이었다. 회전목마가 돌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저희는 죽었어요. 분명히 죽었어요. 불에 타서 아팠고, 숨을 못 쉬어서 괴로웠고, 무서워서 울었어요.”

하늘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순수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섬뜩했다.

“그런데 죽고 나서도 계속 아팠어요. 지하에서 깨어났을 때도 몸이 타고 있었어요.”

민수는 백미러로 하늘이를 바라봤다. 소녀는 여전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왜 우리만 이렇게 됐는지 몰랐거든요. 다른 어른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그... 그때 구조대가 있었잖아...”

“구조대요?”

하늘이가 킬킬 웃었다. 여덟살 아이의 웃음이었지만 오싹했다.

“구조대는 우리를 구하러 온 게 아니었어요. 우리를 옮기러 온 거였어요.”

“옮긴다고?”

“지하로요. 더 깊은 곳으로. 그곳에서 우리를 연구하려고 했어요.”

민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공식 발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저씨도 그때 거기 있었잖아요.”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뭐... 뭐라고?”

“여덟살 때요. 아저씨도 저희랑 회전목마 탔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민수는 기억을 되짚어봤다. 하지만 1980년 당시의 기억은 희미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기억들이 조작되어 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어딘가를 간 것 같기도 하고, 회전목마를 탄 것 같기도 하고...

“아저씨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어요.”

하늘이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불이 났을 때, 입구 쪽으로 뛰어갔잖아요. 우리는 회전목마에서 못 내렸는데.”

민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기억의 조각이 떠오르려 했다. 불길, 연기,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놓치는 느낌...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아저씨 손을 잡으려고 했어요. 같이 도망가려고. 근데 아저씨가 제 손을 뿌리쳤어요.”

“아...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아저씨 엄마가 아저씨 손목을 잡고 끌고 갔어요. 저희는 그냥 두고.”

하늘이가 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45년이 지났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45년 동안 이 상처 때문에 아팠어요. 매일 타고 있었어요.”

민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덟살 자신이 놀이공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던 것. 그리고 불이 났을 때... 하지만 그 다음 기억은 어둠뿐이었다.

“이제 기억나요?”

하늘이가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전혀 예쁘지 않았다.

“괜찮아요. 우리 화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화났지만, 45년 동안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어... 어떻게 이해가 돼?”

“어른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 자기만 살려고 하는 거라고.”

하늘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하에서 45년 동안 연구 당했어요.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한테 이상한 걸 주사했어요. 우리가 왜 죽지 않는지, 왜 계속 여덟 살인지 알고 싶어했거든요.”

민수는 이 모든 게 악몽이길 바랐다. 하지만 하늘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뭔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비슷한 기억의 편린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한테 말했어요. 어른이 되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그래서 우리를 여덟살로 만들어뒀다고.”

“그게... 그게 말이 돼?”

“안 돼요. 우리도 알아요. 그 사람들이 우리로 실험을 한 거라는 걸.”

하늘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여덟살 소녀의 얼굴에 45년간의 분노가 스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맞는 말이었어요. 어른들은 정말 나쁘더라고요.”

“모든 어른이 나쁜 건 아니야...”

“아뇨. 모든 어른이 나빠요.”

하늘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30년 동안 지켜봤어요. 지상으로 올라가서 어른들이 뭘 하는지 몰래 봤거든요.”

차가 갑자기 멈췄다. 민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건설 현장이 아니었다. 어떤 주택가 골목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박재훈 할아버지 집이에요.”

하늘이가 한 집을 가리켰다. 낡은 단독주택이었다.

“할아버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 중 하나예요. 박재훈 오빠. 그때 10살이었어요.”

“우리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어요. 45년 동안 배웠거든요. 어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른인 척해야 했으니까.”

집 앞문이 열렸다. 60세 할아버지가 나왔다. 하지만 이제 민수의 눈에는 그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어린 아이였다.

“민수, 왔구나.”

재훈이가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도 이제 어린아이 목소리였다.

“아저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요.”

“기억을... 되찾는다고?”

“아저씨도 우리 중 하나거든요.”

하늘이와 재훈이가 동시에 웃었다.

“그날 아저씨도 죽었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특별했어요. 10년 동안 실험을 받은 후에 기억을 조작당해서 사회로 보내졌거든요.”

“사회 적응 실험이라고 했어요. 실험체가 일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는 거였어요.”

민수의 머릿속에서 뭔가 터졌다.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차로 함께 돌아왔다.

1980년 5월 25일. 놀이공원. 회전목마.

그리고 화재.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죽었다. 그 다음은 지하 실험실에서의 10년. 주사, 고문, 실험.

그리고 어느 날, 기억을 조작당한 채 새로운 신분으로 사회에 보내졌다. 35년간 자신이 평범한 어른이라고 믿으며 살아온 것이었다.

“이제 이해됐죠?”

하늘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는 35년 동안 어른인 척하며 살았어요. 우리처럼.”

“하지만 아저씨는 몰랐죠. 자신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걸.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걸.”

민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50대 어른의 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진짜 모습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재훈이가 민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열 살 소년의 작은 손이었지만, 그 손에서 이상한 온기가 전해졌다.

민수는 백미러를 다시 봤다.

거울 속에는 여덟 살 소년이 앉아 있었다. 1980년 그날의 민수였다.

“이제 우리 같이 놀 수 있어.”

하늘이가 손뼉을 쳤다.

“35년간의 거짓말은 끝났어요. 이제 진짜 자신으로 돌아온 거예요.”

창밖으로 건설 현장이 보였다. 벌써 오전 8시가 되어 작업자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어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하에서 올라온 것들의 영역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재밌는 놀이를 시작해볼까?”

세 아이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지하에서 회전목마 음악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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