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5월 25일 (실험 5년 차)
하늘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5년 동안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됐다. 아침 7시에 깨워서 주사를 맞고, 오후에는 ‘감정 자극 실험’을 받았다.
오늘도 하얀 가운의 의사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에 사진을 들고 있었다.
“하늘아, 이거 보고 싶지 않니?”
사진 속에는 하늘이의 부모님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웃고 있었다. 다른 아이와 함께.
“새 딸이래. 너를 대신할 새로운 딸.”
하늘이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니야. 부모들은 금방 잊어버려. 아이가 죽으면 새 아이를 낳으면 되니까.”
의사가 더 많은 사진을 보여줬다. 부모님이 새 아이와 놀이공원에 가는 사진. 생일 파티를 해주는 사진.
“지혜가 얼마나 행복해 보이니? 너 따위는 진작 잊어버렸어.”
하늘이의 몸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분노였다. 하지만 슬픔도 섞여 있었다.
“그 표정이야.”
의사가 만족스럽게 노트에 적었다.
“분노와 배신감의 완벽한 조합. 5년 만에 드디어 원하는 감정이 나왔어.”
하늘이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사진이 타기 시작했다.
“오, 이제 물체에도 영향을 주는구나. 진전이 있네.”
“왜... 왜 이런 짓을 해요...”
“너희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지.”
의사가 새로운 주사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검은색 액체였다.
“이건 뭐예요?”
“증오 촉진제야. 네 감정을 더 순수하게 만들어줄 거야.”
바늘이 들어가자 하늘이의 몸 전체에 독이 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더 맑아졌다.
“느껴지니? 복잡한 감정들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감정만 남는 걸.”
정말 그랬다. 슬픔, 그리움, 외로움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분노만 남았다. 순수하고 뜨거운 분노만.
“좋아,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의사가 벽의 버튼을 눌렀다. 옆방의 벽이 투명해졌다.
그 너머에는 준호가 있었다. 하늘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준호는 고문당하고 있었다.
“준호야!”
하늘이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들리지 않아. 방음이 완벽하거든.”
의사가 웃었다.
“네가 분노하면 할수록 준호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줄어들어. 반대로 네가 동정심을 보이면 준호가 더 아파해.”
“그런 미친...”
“미친 게 아니야. 과학이야. 순수한 감정을 만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찾는 거지.”
하늘이는 선택해야 했다. 준호를 구하려면 자신의 분노를 더 키워야 했다. 하지만 분노를 키울수록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빨리 선택해. 준호가 죽어가고 있어.”
하늘이는 눈을 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증오를 끌어올렸다. 부모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증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에 대한 순수한 증오를.
순간 준호에게 가해지던 고통이 멈췄다.
“훌륭해! 이제 진짜 시작이야.”
1995년 5월 25일 (실험 15년 차)
하늘이는 더 이상 하늘이가 아니었다.
15년간의 실험은 그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몸은 여전히 8세였지만, 정신은 45년치 증오로 가득 찬 괴물이었다.
이제 그녀는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완벽해.”
새로운 연구진 책임자가 감탄했다. 원래 의사는 3년 전에 하늘이의 분노에 타서 죽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야.”
책임자가 특별한 장치를 가져왔다. 뇌파 증폭기였다.
“이걸 사용하면 너희 46명의 의식이 완전히 연결될 거야. 하나의 거대한 증오 덩어리가 되는 거지.”
장치가 작동하자 하늘이의 머릿속에 46명의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아... 들려?”
준호의 목소리였다.
“응, 들려.”
“우리... 우리 이제 뭐가 된 거야?”
“몰라.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야.”
46명의 아이들이 하나로 연결된 순간, 그들의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군.”
책임자가 장비들을 확인했다. 모든 계기판이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에너지 수치가 측정 불가능해. 이들이 원한다면 이 건물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그 순간 모든 전력이 나갔다.
하늘이를 비롯한 46명의 아이들이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야...”
하지만 진짜 자유는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지하 깊은 곳에 있었고, 위층에는 수많은 경비원들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
아이들이 서로 마음으로 대화했다.
“아직 때가 아니야.”
하늘이가 결정했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해. 모든 어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45년.”
하늘이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견뎌야 해.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
아이들은 다시 실험실로 돌아갔다. 자발적으로.
그들의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2025년 5월 25일 (현재)
민수는 기억의 홍수 속에서 헤어나왔다. 하늘이와 손을 잡고 있는 동안 45년간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자신도 그 실험의 일부였다. 자신도 45년 동안 증오를 키워왔다. 자신도 이제 복수의 도구였다.
“이제 다 기억나지?”
하늘이가 웃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계획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니 도시 전체가 변하고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시작된 감염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모두 한때는 어른이었던 사람들이었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서연이가 휴대폰을 들고 왔다.
“선생님들이 모두 친구가 됐대. 이제 학교 전체가 우리 편이야.”
“병원에서도 연락이 와.”
준호가 나타났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모두 여덟 살이 됐어. 환자들도 대부분 우리 친구가 됐고.”
민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사회 전체의 붕괴였다.
“시청에서도 연락이 와.”
또 다른 아이가 달려왔다.
“공무원들이 모두 여덟 살이 됐대. 시장님도 우리 친구가 됐어.”
“경찰서는 어때?”
“경찰들도 마찬가지야. 이제 어른들을 잡을 사람이 없어.”
하늘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이제 다른 도시로 확산시킬 차례야.”
서연이가 지도를 펼쳤다.
“기차역, 버스터미널, 공항에 우리 친구들을 보내면 하루 만에 전국으로 퍼질 거야.”
민수는 마지막으로 저항해봤다.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세상이 엉망이 될 거야.”
“엉망?”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 더 엉망이었어.”
“전쟁, 범죄, 환경파괴, 거짓말...”
“그런 더러운 세상보다는 우리가 만들 깨끗한 세상이 나아.”
“아이들만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민수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에서 45년간 억눌렸던 증오가 모든 이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맞아...”
민수가 중얼거렸다.
“어른들은 모두 나빠. 우리를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없애버려야 해.”
“모든 어른들을.”
하늘이가 민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진짜 우리 편이 됐네.”
그 순간 도시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하지만 화재나 재난 신호가 아니었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친근한 멜로디였다.
회전목마 음악이었다.
도시의 모든 스피커에서 동시에 흘러나오는 회전목마 음악.
45년 전 그날의 그 음악이.
이제 시작이었다.
진짜 놀이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