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119: 나는 너의 완벽한 지옥
시간이 멈췄다. 아니, 하진의 세계만 멈춰버렸다. 서버 팬이 돌아가는 소리, 키보드 자판이 부딪히는 소리, 동료들의 나직한 대화 소리. 모든 것이 아득한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강도운의 모니터, 그 안에 떠 있는 동생의 심박수 그래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72bpm. 안정적이라는 의미의 녹색 숫자가, 지금 그녀에게는 목숨을 재는 카운트다운처럼 보였다.
그녀의 뇌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해커로서의 본능이,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할 버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떻게? 그가 어떻게 동생의 심박동기 제어권을 탈취했지? 의료기기 네트워크는 폐쇄망으로 운영되는 것이 원칙이다. 외부 인터넷망과 연결되었더라도, 최소 3중, 4중의 암호화 프로토콜이 걸려있을 터였다. 그것을 뚫었다고? 개인이? 이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을 설계한 나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해냈다. 그리고 이제 그 칼자루는 온전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수석님.”
강도운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수석님과 유준이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요. 오히려 더 안전하게 지켜주려는 겁니다. 이제 우리만 아는 비밀이 생긴 거네요. 왠지 더 가까워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라고 말했다. 끔찍한 공포가 담긴 비밀을 공유한 공범자들의 유대감. 하진은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은 위로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명백한 협박이자, ‘너는 이제 내 손바닥 안’이라는 소유권 선언이었다.
그날 이후, 하진의 일상은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지하 7층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목에 보이지 않는 전자 목줄을 찬 노예였다. 강도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를 대했다. 여전히 다정하게 커피를 건넸고, 업무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친절에는 이제 서늘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퉁명스럽게 굴거나 그의 말을 무시하려 하면,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모니터를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녀를 완벽하게 통제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하진은, 속수무책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였다. 월간 성과 보고 회의에서, 사사건건 그녀의 성과를 무시하고 사내 정치에만 몰두하던 박 대리가 또다시 그녀를 걸고넘어졌다.
“서하진 수석은 너무 개인 플레이만 하는 경향이 있어. 팀워크라는 걸 좀 배워야 하지 않겠어? 혼자 잘나서 하는 일이 얼마나 가겠냐고.”
언제나처럼 무시하면 그만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하진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강도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자, 그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강도운]
선배님, 저기 박 대리님, 너무 거슬리지 않아요?
그의 메시지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확했다.
[강도운]
선배님의 위대한 천재성을 몰라보는 저런 사람은, 이 연구소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작은 벌이라도 받아야죠.
하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애써 답장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의 손으로, 저 사람을 벌하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거든요. 우리의 유대감을, 사랑을 증명해봐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하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명백한 범죄 교사이며, 잔인한 협박이다.
“미쳤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강도운은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볼 수 있도록 모니터를 돌렸다. 동생 유준의 심박수 그래프가, 붉은 경고등과 함께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녹색의 안정적인 선은 사라지고, 심장이 터져버릴 듯 뾰족하게 솟구치는 붉은 파도가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Heart Rate: 168bpm (Danger)
“선배, 동생이 괴로워하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도 잔인했다.
하진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동생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 겁에 질린 얼굴. 이 모든 것이 저 숫자 때문이었다. 저 숫자를 내리고 싶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그녀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강도운은 하진의 PC에 원격으로 접속했다. 그녀의 눈앞에, 검은 명령어 창이 떴다.
그 위로, 그의 손가락이 날아다니듯 명령어를 입력했다.
Format C:\Users\박팀장\Documents
박 대리의 10년 치 연구 자료가 담긴 폴더를, 영원히 복구할 수 없도록 포맷해버리는 명령어.
“선배가 저 엔터 키를 누르는 거예요. 그럼 동생의 심장은 다시 안정될 겁니다. 선택하세요.”
비명 같은 동생의 심장 소리가 하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진의 손이 벌벌 떨렸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만은 안 된다.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범죄. 하지만 저 숫자가 0이 되는 것을 상상하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키보드 위로 가져갔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
그녀의 모든 자부심과 윤리의식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버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탁.
경쾌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이 엔터 키를 눌렀다.
동시에, 강도운의 모니터 속 붉은 파도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Heart Rate: 72bpm (Stable)
하진은 텅 빈 눈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나는 살인자와 다름없는 짓을 했다.
아니, 어쩌면 살인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던 ‘서하진’이라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