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흔한 병

'범재'의 역설계 욕망

by 재서기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Omnis ars naturae imitatio est) - 세네카


작품을 생산하는 이들이 시달리는, 흔한 병이 있다.

이른바 '레퍼런스 리버스 엔지니어링 증후군'이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란 기존 제품이나 시스템을 분해해 설계 원리를 역으로 분석하는 행위.

작품 역시 사람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제품'인지라 이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가능한 건데, 이게 일상생활에서 패시브로 작용하는 게 문제다.

남들이 웃고 울며 컨텐츠를 즐길 때, 혼자서 컨텐츠 속 온갖 요소를 곱씹고 되짚는 진지충 모드가 되는 거다.

거기에 성에 차지 않는 작품을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비평이 툭툭 튀어나온다. 여러모로 함께 컨텐츠를 즐기는 파트너로서는 영 좋지 않은 타입이 되는 거지.


요즘 작품을 '공산품'으로 규정하고 들여다보면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물리학적 작품, 생물학적 작품, 화학적 작품.


Rube_Goldberg%27s_%22Self-Operating_Napkin%22_%28cropped%29.gif '골드버그 장치'처럼 각기 다른 모양이지만 작용하는 법칙들은 정해져 있다.

물리학적 작품은 소위 '기승전결'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등으로 설명되는 작품의 구조와 사이사이에 배치되는 '클리셰'에 충실한 유형이다.

결국 설계도 대로 조립된 양산품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상업적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최적화된 설계도에 충실하게, 그러면서도 기준 수치를 충족하는 새로운 제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가장 어렵고 많은 재능과 노력을 요구하는 과제다.

그래서 아주 잘 만들어진 '물리학적 작품'은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공작 세공품을 보는 것처럼 미학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감탄을 불러내는 작품이 되는 거고.

물론 가장 큰 난관은 역시 '높은 분'들의 안목이다.


반면, 생물학적 작품은 태생적으로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생산품이다.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은, 아주 새로운 형태의 제품. 거기에 존재하고 기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은 충족하면서도, 곳곳에 파격과 개성이 배치되어 보는 이의 예상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꿈틀대는, 역동적인 작품인 거다.

이들은 또다른 물리학적 작품의 새로운 설계도 유형의 베이스가 되기도 한다.

tempImage2Nt4Jm.heic 몬스터로 치면 '키메라' 같은 거겠지.


마지막으로 '화학적 작품'은 뭐냐고?

사람의 본능을 건드리는 '호르몬 자극' 요소로 무장한 생산품이다. '억지인 줄 알면서도 눈물이 나는', '어처구니 없지만 웃게 되는' 유형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잘 설계된 구조에 효율적으로 배치된 화학 요소들은 '물리학적'으로도 훌륭하게 작동하며 시너지를 발휘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화학적 작품'은 태생적 생명력을 발휘하기에도, 구조적으로 철저히 기능하기에도 역량부족인 작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겉보기엔 관객의 웃음과 울음을 유발하며 제기능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기능하지 못하고 달고 있는 화학합성물 포대 안 내용물을 풀어내는 것 뿐이다. 포대가 다 비어 쪼그라들었을 때, 관객은 스스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 엉성한 작품의 뼈대를 발견하게 되는 거고.

IE003128172_PHT.jpg 그러니까, 최루탄 연기 뒤에 숨은 앙상한 구조물 같은 거.


작품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품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수많은 갈등의 골을 넘어야 하는지 체험했기에, 작품을 노골적으로 리뷰하고 비평하는 일은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패시브'로 작동하는 이 '역설계 욕망'은 어쩔 수 없다. 작품이 설계에서 삐끗한 부분을 발견했을 때, 필요 이상의 '합성물 포대'를 달고 있단 걸 느꼈을 때,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고민하게 되는 거다. 이건 결국, '천재'처럼 자연을 모방해 완전히 새로운 생물학적 작품을 만들려 애쓰지만, 결국 구조와 법칙에 의존하게 되는 '범재'가 평생 몰두해야 할 고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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