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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김 Mar 25. 2024

산수유꽃 보러 다녀왔습니다

가출을 가장한 혼자만의 여행이야기

작년 이맘때였나 보다. 겨울을 지나 볕이 따뜻한 봄이 찾아온 듯했으나 바람만은 아직은 차가운 꽃샘추위가 있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이유는 뭐 별다른 거 없이 늘 있어온 답답함이다. 늘 반복되던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이 주된 이유였겠고 그즈음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집에 잠시 와 계셨던 시어머님이 그 마음을 부추겼다. 내가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붓자 시어머니도 나를 향해 잔소리를 조금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껏 퍼부었으면서도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듣기 싫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어머님으로 인한 부자유가 나의 몸을 비틀리게 했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녁 찬거리로 콩나물을 사가지고 오는 길에  사춘기 아들도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 집을, 시어머님이 버티고 있는 이 집을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무거운 발을 이끌고 꾹 참고 밥을 지어먹고 억지웃음도 지어가며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억지감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대충 옷을 챙겨 집을 나왔다.     

 무작정 집을 나와 운전대를 잡고 잠시 고민했다. 언니가 사는 전주로 갈까? 아니다. 이제 다 커서 알 거 다 아는 조카들 보기가 민망하다. 집 나온 이모라니..

나는 전주로 가는 서해안고속도로가 아닌 순천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정한 곳은 구례의 작고 아담한 섬진강가에 있는 펜션.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와 본 적이 있어 익숙하기도 했고 혼자 지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펜션 앞쪽으로는 섬진강이, 뒤쪽으로는 벚꽃길이 즐비하여 벚꽃이 한창일 때는 섬진강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어 자전거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벚꽃 필 즈음이 아니기에 한산한 펜션에 해 질 녘 즈음 도착하여 짐을 놓고 햇살이 쏟아지는 강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가득한 섬진강 가는 아직 싸늘한 바람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간간이 지나가는 화물기차소리와 햇살에 반짝이는 물빛이 아름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아도 그저 좋았다. 힘들었던 마음들은 어딘가에 잠재운 채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던 중 곧이어 배가 고파왔고 나는 근처 편의점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고독을 씹어먹기 딱 좋은 짙은 베이지색의 긴 외투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강가를 걷는 쓸쓸한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고독을 느끼는 것도 잠시. 강을 건너는 다리 즈음 오니 어느 한 아저씨가 빨간 꽃무늬 바지에 노란 깔깔이를 걸치고 다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나를 주시한 채. 주변엔 차 한 대가 다니지 않는 그곳에 아저씨와 나만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도 치밀었다.

나는 속으로 

'아~ 정말!! 여자들은 고독도 마음대로 못 씹어먹는거야?' 하며 아저씨를 못 본 척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아저씨가 무슨 죄인가. 그냥 꽃무늬바지에 깔깔이 좀 입고 어슬렁거렸을 뿐인 것을.. 내가 좀 오버였다. 인정한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돌아오는 길에도 혼자 서 있던 꽃무늬바지 아저씨를 서둘러 지나쳐 무사히(?) 펜션에 도착했다. 사 온 음식들을 먹으며 드라마 시청과 멍때림, 여기저기 나의 가출을 알리는 전화통화 등으로 밤을 보내고 또 하루를 멍하니 펜션에 머물렀다. 그 고요함(?)이 좋았고 아무도 없다는 게 좋았다.  혼자 이곳을 독차지하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이틀밤을 보내고 사온 먹거리를 다 먹고 나니 슬슬 구례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운조루와 산수유마을로 향했다. 운조루는 풍수지리상 명당인 고택으로 그 평안함을 느끼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공사 중이어서 잠시 고택 뒤편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나오는 길에 주변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에게서 주머니에 있던 현금 7천 원을 모두 내어 쑥을 한주먹 샀다. 시골인심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한주먹이어서 바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따순 햇살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참을 더 운전해서 반곡 산수유마을을 찾았다. 평일 월요일이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다.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길을 올라가는데 어제는 고독을 씹어먹기에 딱이었던 나의 길고 칙칙한 외투는 더 이상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저기 연인들의 화사한 봄빛을 띈 옷들과 싱그러운 얼굴들이 산수유꽃과 어우러져 한층 밝은 빛을 띄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개의치 않아 보이기 위해 검은 마스크를 쓴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더 꼿꼿하게 들어올리며 긴 외투를 감싸 안고 천천히 오랫동안 산수유마을을 음미했다. 집집마다 벽에 적힌 시구들과 개천을 둘러싼 산수유나무들의 노오란 빛을 온전히 받으며 그렇게.. 그렇게..     

나 혼자 화사하지 못했던 날, 그 훤하디 훤한 산수유마을은 나를 초라해 보이게 했지만 집에 돌아갈 힘 정도는 주었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고속도로를 지나다 들른 벌교휴게소에서 먹은 순두부찌개가 어찌나 맛있던지.. 

왠지 '이것은 순두부찌개에 들어간 것!'이라는 느낌으로 옆에서 떡하니 팔고 있던 홍게간장을 사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 아이들 먹일 단팥빵도 샀다. 이것저것 사고 나니 관광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독을 씹으며 가출 중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둘째 시동생 집으로 가고 안 계셨다. 아마 나 때문인 듯하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뒤이어 아들은 미안하다고 말을 걸어온다. 나는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바가지 쓰고 사온 쑥으로 국을 끓여 저녁을 지어 먹이고 다음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출근을 했다.     

집 근처 산수유나무에 피는 꽃망울을 보며 그때를 생각한다. 나의 고독과 칙칙함이 대비되던 그 훤하딘 훤한 산수유마을을..

그 이후로도 갈등과 답답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섬진강과 산수유마을에서의 고독한 추억이 아직까지도 나를 버티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곱씹으며 살아갈 힘을 주는 것.     

 한 해를 지나며 나도 아이도 자라는 것일까. 조금은 서로에 대한 고집과 기대를 내려놓고 산수유꽃을 바라보듯 노오란 아이를 천천히 오랫동안 바라보니 봐줄 만하다. 부드러운 빛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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