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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김 Jul 14. 2024

비교본능

‘우리 반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라는 앙케트에서 당당히 1위를 한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제일 행복해 보인대. 넌 어떻게 생각해? “

“아니거든! ”

“왜 아니야? 내가 봐도 네가 젤 행복해 보이는데? “

“엄마가 게임 못하게 하니까! ”

라고 대답하는 거 보면 행복한 게 확실한 듯하다.

최근 아이들 시험이 끝난 후 좌절감을 맛보고 있는 나는 비교본능으로 인해 더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내 주변엔 다들 바르고 공부 잘하는 자식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엄친아여서 우리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비교된다.

이렇게 키운 내 탓이려니 하면서도 유전자의 영향이 크려니 생각하면 또 남편이 원망스럽고,

이미 엎어진 일 이왕 낳은 거 마냥 노는 꼴은 못 봐주겠어서 들인 사교육비도 아깝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줄 수도 없는 이 딜레마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반면 이런 나와 달리 아이들은 큰 타격감이 없다. 왜냐하면 같은 비교본능이 있지만 아이들은 위를 보지 않고 밑을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나보다 못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로 오히려 위로를 받는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 그저 시험이 끝난 것만으로도 행복을 만끽한다.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급여 업무를 볼 때 같은 직장 내 다른 직종의 직원들의 급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때만큼 비교 본능으로 힘들었던 적도 없는 듯하다. ‘내가 왜 공부를 더 안 했을꼬~ 조금만 더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과 함께 직장생활의 만족감은 줄어들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더랬다. 그러다 직급이 올라가고 급여업무를 하지 않으니 여전히 직종 간 급여차이는 존재하지만 더 이상 나는 그런 비교를 하지 않게 되었다. 보지 않으니 비교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비교본능을 이런 식으로 나의 못났음을 탓하는 쪽으로 쓰지만 그 비교 본능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나와 다르게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한 사람들 앞에 군림하려 하고 무시하고 깎아내린다. 황인종은 백인을 선망하며 흑인보다는 하얀 피부를 가진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흑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같은 황인종에 속하더라도 그중에서도 더 피부색이 진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한다. 직업의 경우에서도 같은 직종이라 하더라도 서울이나 큰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더 우월하다 여기며 작은 단위 기관은 그보다 못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 우월함의 끝은 무엇인가. 백인들은 흑인이고 황인족이고 똑같이 무시하는데? 서울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미국이나 유럽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은 생각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경우가 있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 경우가 있다. 전자는 겸손하지 못한 인성쓰레기들에게 필요한 것이며, 후자는 겸손하다 못해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 경우 비교본능은 때론 자신감을 주기도 하고 위로를 보내주어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봤을때 나와 아이들은 비교본능을 정반대로 쓰고 있으니 적당히 섞여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이 정도면 됐어.

건강한 걸로 충분해.

학교는 가잖아.

학원도 빠지지 않고 가는 성실함도 있다구!

어디 가서 사고 치지 않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어디야.

흐흐 흐흐흐

흐흐 흐흐흐 ‘

하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겠고

아이들에게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공부라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야.

솔직히 이 정도 점수는 자존심 상한다구!

공부라는 것을 좀 해볼까?

허허허허 허허허허‘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조화로운 세상은 비교본능의 적절함에서 온다. 본능이라서 어찌 할 수 없다라면 무엇이 됐건 모두가 행복한 쪽으로 비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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