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일흔, 콘크리트를 깨다

by 상아


일흔이 되던 해, 그녀는 인생에 덧씌워진 ‘콘크리트’를 조금 걷어내 보기로 했다.


한반도 남단의 가장 따뜻한 남강반도 초입의 안천마을, 주방 식탁 앞에 앉으면 눈높이 그대로 바다가 찰랑이는 집을 샀다. 180평 남짓한 마당은 전 주인이 깔아놓은 두꺼운 콘크리트가 바닥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다.


그녀는 굴착기를 불렀다.

엔진 소리가 마을을 흔들었다. 굴착기 버킷이 바닥을 찍는 순간, 짧고 건조한 파열음이 터졌다.


“사모님, 이거 다 깨부실라요?”
시동을 낮춘 기사가 물었다.

“예. 흙을 좀 볼라고요..이렇게 사람 다니는 길 빼고 다 걷어주쇼..”

기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요즘은 다 덮어놓고 사는디. 다시 깔라믄 몇 백은 들 것인디? 물리기 없어요. ”

그녀는 대답 대신 갈라지는 금을 내려다보았다.


굉음과 함께 시멘트가 들려 올라갔다. 먼지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회색 가루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웃들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운 마당을 우째 깬다요?”
“풀도 안나고 좋구만. 시골서는 시멘 마당이 최곤디. 큰 돈들여 만든 마당을 왜 부순대?”

말들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갈라진 회색 바닥 아래에서 붉은 흙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는 한 걸음 다가섰다. 삽 끝에 찍힌 흙이 축축하게 붙어 있었다. 오래 눌려 있던 냄새가 뒤늦게 올라왔다.


그녀는 발끝으로 가장자리를 밟아보았다.

말랑했다.

그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갈라진 회색 바닥 아래에서 붉은 흙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는 알았다. 이건 무언가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남들에겐 손 많이 가는 마당일지 몰라도, 그녀에게 그곳은 오래 미뤄두었던 자기 자리였다. 콘크리트를 걷어낸 자리에 잔디를 심고, 흙을 밟는 시간을 다시 삶 속으로 들였다. 남이 만든 세상에서 버텨온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녀는 늘 작은 세상을 하나씩 만들어 왔다.


서른 여덟, 가족을 해체하고 나온 그 날 이후 그녀는 멈추는 법을 잊고 살았다. 일흔이 된 지금, 왜 콘크리트 마당을 부수며 붉은 흙을 찾아 헤매는가. 이 바닷가 집은 가족들이 다시 모이는 화합의 장이 될까, 아니면 그녀를 옥죄었던 이름들로부터의 완전한 도피처가 될까.


날이 밝았다.

메마른 논바닥 너머 아스라히 아름드리 나무형체가 나타난다. 오백년 된 이팝나무가 아직 잎도 틔우지 않은 채 서 있다. 나무의 골격만 보이는 이른 봄처럼 그녀의 삶도 이제야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대문 밖에 노란 무쏘가 그녀를 재촉하듯 햇빛을 반사하며 서있다. 환갑에 만나 10년을 함께 해온 사업동반자다. 그녀를 태우고 자담농장으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자담은 그녀가 붙인 농장 이름이다. 처음 산비탈에 고사리 농장을 만들때, 열둘이나 되는 자손들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자담 농장. “자연을 담다” 자식들의 무관심조차 그녀에게는 온전한 자유의 시작이었을까.


아무도 없는 시골길, 그 길을 달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잡은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던가. 어스름한 새벽, 바닷가 집에서 고사리 농장까지 가는 그 30분은 단순한 출근길이 아니었다. 세상이 씌워 둔 이름과 역할을 벗겨내고, 그녀가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무엇인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지금 이 흙을 밟는 발끝에는 온전히 '그녀다운'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제 막 굳은 콘크리트를 걷어낸 마당에 그녀의 진짜 시간을 채워넣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