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생의 첫 발자국

by 상아

자담 농장 한편에는 낡은 농가 한 채가 있다. 농막으로 쓰기에 알맞은 집이다.

8년 전 이 땅을 산 뒤 이 농막을 아지트 삼아 농장을 일궜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 집안 깊숙이 햇살을 드리울 때,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루 끝을 스치고 들어온 바람이 등을 천천히 훑고 지나간다.


어느 주말, 네 살배기 손녀가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찐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아이의 맨발이 허공에 대롱거렸다. 옥수수 알을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하얀 발끝이 조금씩 흔들렸다. 아직 세상 어디에도 깊이 닿아본 적 없는, 가볍고 평화로운 발이었다.


그 발을 보고 있자니 오래된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은화야, 나는 여적도 니 그 발만 생각하믄 예가 아릿하다.”

어머니는 가슴에 손을 얹고 그 말을 자주 했다.


1950년 5월, 은화씨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났다. 작고 어린 새색시였던 어머니는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고 서울집을 지켰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겨울 문턱에서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업고 친정 언니가 있는 남쪽 도시 덕천로 향했다.

서울에서 덕천까지, 300킬로미터를 석 달동안 걸었다고 했다.


“겨울이었는가. 그 어린 거를 업고 걷고 또 걸었어야.”

사람들 틈에 섞여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 보면 버려진 집이 있었다. 쌀독에 쌀이 남아 있고, 김장독에는 김치가 그대로였다. 냇가에서 물을 퍼다가 쌀을 안치고, 밥이 되면 물에 말아 숟가락으로 아기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애기가 못 걸은께 내내 업고 다녔제. 근디 그 째깐한 발이 자꾸 포대기 밖으로 나와브러. 천으로 싸고 또 싸맸제. 몇 달을 찬바람 맞고 걸었은께, 얼마나 드럽겄냐. 하루는 볕이 좋아서 풀어 봤더니, 발이 얼음이 들어 빨갛게 부어 부렀드라고….”

그 발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가슴이 먼저 아려왔다.


틈만 나면 어머니는 피난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슴 속에 그리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어린 자식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는 지, 전쟁통에서 자식을 지켜낸 자랑스러움이었는 지 분명하진 않았다.


덕천에서 10킬로미터쯤 더 변두리로 들어가면 이름부터 고향스러운 석씨 집안이 모여사는 석뫼에 당도한다.


그 마을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은화씨의 이모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사는 형편은 별 볼일 없어도 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살림이었다. 이곳은 수십년 후까지 진정한 그녀의 고향이 되었다. 사촌 동생들 몰래 곶감도 주고, 어린 은화를 쓰다듬어 주던 이모의 사랑은 어머니의 그것과 다른 결이었다. 후일 은화씨는 이모의 손길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단호한 결단으로 자식을 지켜낸 어머니의 사랑이 DNA로 은화씨에게 전해졌다면 자애로운 이모의 손길은 그녀가 힘에 부칠 때마다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가장 먼저 석뫼가 떠올른다. 이모의 사랑이 불러온 희미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가 돌아왔다. 부부는 다시 삶을 일구었다. 아버지는 참외를 남들보다 한 달 먼저 수확하는 기술을 배워 제법 돈을 모았다. 세상사 이치를 깨닫는 빠른 눈썰미도 있었고, 실행에 옮기는 행동력도 있었다.


돈을 벌려면 도시로 가야한다면서 은화씨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 세 식구는 덕천의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집안 살림은 늘었다. 노른자 땅인 덕천 역전에 다섯 칸 기와집을 올렸다. 두 칸은 세를 주고, 안쪽에는 별채를 지어 또 세를 받았다. 그 시절 드물게 시멘트 욕탕이 있는 집이었다.


그 집에서 오남매가 자랐다.

일요일이면 열일곱살 은화씨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크게 틀어놓고 네 명의 동생들을 욕조에 들여보냈다. 일곱살, 네살 쌍동이, 그리고 갓 돌을 지난 막내동생까지. 쇠로 된 펌프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눌러 길어 올린 물로 욕조를 채웠다. 아이들은 물을 튀기며 찰박거렸고, 그녀는 음악에 맞춰 발바닥으로 시멘트 욕조 바닥을 두드렸다. 물소리와 피아노 선율이 뒤섞이는 동안, 그녀의 발은 이미 집안 살림의 한쪽을 떠받치는 든든한 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손녀가 옥수수를 다 먹고 툇마루에서 내려온다. 보드라운 발바닥이 투박한 흙을 딛는다. 잠시 균형을 잡더니, 아이는 다시 힘차게 달려 나간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 뒷모습을 본다.


포대기 밖으로 자꾸 빠져나오던 아기의 발,
욕조 바닥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던 소녀의 발,
이제는 산을 오르내리며 길을 내는 단단한 발.


흙 위에 남은 작은 발자국들이 아직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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