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풍년연쇄점 뒤편 골목

by 상아



이른 봄, 자담농장 산등성이에 서면 발아래로 잔잔한 호수가 펼쳐진다.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나무들이 엷은 빛 속에 뼈대만 드러낸 채 서 있는 계절. 낮과 밤이 뒤섞이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면, 서늘한 물안개 사이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1970년대 초. 결혼 살림은 시작부터 끼니보다 먼 그늘이 내려앉았다. 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괜찮은 직장이 있었지만 다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처음 몇 달을 제외하고는 생활비 봉투의 두께가 들쑥날쑥했고, 몇 달씩 생활비가 끊기기도 했다. 그는 그 그늘을 걷어낼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삶의 변화를 위해, 네 식구는 이웃도시로 향하는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기차는 어둠 속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한밤 중, 왜소한 기차역에 내렸을 때 마중 나온 것은 차가운 밤바람뿐이었다. 떠나는 기차의 불빛이 멀어질 때, 인생은 되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양손에 아이 둘의 손을 쥐고, 임신한 몸으로 남편 뒤를 따랐다.


왼쪽에는 어두운 산자락이, 오른쪽에는 끝없이 이어진 벽돌담이 있었다. 한참을 걷자 돼지저금통이 매달린 ‘풍년연쇄점’이 나타났다. 그 뒤 골목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가팔랐다. 셋째를 임신해 부른 배를 안고 그 비탈을 올랐다.

‘이 길 끝에 정말 풍년이 있을까.’


새 집은 산비탈이었지만 방이 네개나 되었고, 꽤 넓은 마당과 화단이 있었다. 문간방은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고, 작은 방은 하숙을 놓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규칙적인 돈줄을 만들어야 했다.


불규칙했던 생활비 봉투는 손에 들어오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일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보다 허망했다. 말을 건네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무력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선택적으로 입을 닫았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새벽 다섯 시에 파출부 일을 나갔고, 낮에는 여관 이불을 받아다 삯빨래를 했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시절에 2조식 세탁기 두 대가 집으로 배달되던 날, 아이들은 신나했다. 하지만 세탁기의 쇳소리가 그녀에게는 인생의 톱니바퀴가 삐걱대는 소리로 들렸다. 아이들에겐 너른 마당에 가득 나부끼던 이불 빨래 사이로 숨꼭질하던 즐거운 추억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젖은 이불의 무게만큼 짓눌리는 노동의 현장이었을 뿐이었다.


보험회사 영업도 잠시 해봤지만, 차마 지인들에게 보험을 들어달라는 부탁은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곧 집안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한 보험증권만 쌓여갔다. 그녀의 천성은 이 일과는 맞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이 고요한 성실함만으로는, 이 비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어둠은 이미 산 아래로 번지고 있었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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