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만 되어도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며 노는 일을 싫어한다. 그보다 더 스릴 넘치는 재미난 휴대폰 때문이다. 휴대폰은 고개를 숙이고 몇 시간 동안 있어야 해서 거북목이 되기 쉽고 또 같은 자세로 앉아 있기 때문에 체형이 비뚤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른 놀이거리를 찾아보라고 할 수도 없다. 아기자기한 동네 골목은 사라진 지 오래고 길거리는 온통 차들로 넘쳐나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위험 요소가 적은 학교 운동장은 안전사고 때문에 마음 놓고 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고가 나면 학교 책임이 되고 복잡한 보상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많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그네가 사라진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고 마냥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최대한 안전한 학교를 이용해 놀게 해야 한다. 내 경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놀게 했다.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마음졸이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맘 놓고 놀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논다. 철봉에 대롱대롱 거꾸로 세상을 보거나, 거침없이 맨발로 모래판 위를 뒹굴어 다니거나, 울타리 밑에 죽어있는 새를 발견하고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해쳐보거나, 돌멩이로 악기를 만들어 춤을 추기도 한다. 놀이를 통해 익힌 감각을 갈고 닦아 어떤 아이는 과학자, 어떤 아니는 악기 연주자나 운동선수가 된다. 그러니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지 알려면 놀게 해야 한다. 어렸을 때 실컷 놀아야 자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매진할 수 있다.
수업을 끝내고 막 한숨 돌리려는데 한 아이가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종현이가 다쳤어요!” “그래? 얼마나 다쳤어?”
깜짝 놀라 부랴부랴 아이를 앞세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운동장 한 귀퉁이 미끄럼틀 옆에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가는데 젊은 체육 선생님이 종현이를 안고 달려왔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바짝 붙어가며 종현이를 살폈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볼을 타고 목덜미까지 흘러내리고 일부는 상의에 묻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눈을 다치지 않은 점이었다.
보건실에서 지혈하는 동안 율이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현무막대기를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는 도중 율이가 높이 던진 현무막대기에 맞았다고 한다. 지혈이 끝나자마자 종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상처가 깊어 꿰매지 않으면 흉터가 남을 수 있다는 보건 선생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종현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아 아버지에게 연락했다. 종현이 엄마나 자신도 멀리 있어 당장 올 수 없으니 대신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평소에 종현이가 다니는 병원이 있는지 물었다. 동의를 얻어야 나중에 탈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나중에 어머니가 원망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대학병원에 가야 하는데 개인 병원을 데려갔다고.
흉터는 조금 남을 수도 있겠지만 수술도 잘 끝나고 아이들도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첨예한 갈등을 예고하는 보상 문제였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다칠 경우를 대비해 학교안전공제회를 들어놓는다. 거기서 크고 작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종현이 같은 경우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 보상 범위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이들끼리 놀다 다쳐도 큰 사고 아니면 보상을 요구하는 일이 드물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언제든 가해자가 될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또 부모도 다치면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넘어가 주었다.
밀고 당기는 씨름 끝에 종현이는 율이의 손해보험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말과 힘겨루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른들의 힘겨루기가 아이들의 놀이를 위축시키지 않기를 바랐다. 하루빨리 상처를 극복하고 단단한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어른이 되어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갈 기회가 있었다. 까치발을 해야만 넘겨다 볼 수 있었던 울타리가 겨우 허리춤에 닿았다.
컴퓨터도 학원도 텔레비전도 없던 그 시절에는 눈만 뜨면 나가 놀았다. 마을 공터나 골목 어디든 가리지 않고 놀았다. 나무토막, 돌멩이, 지푸라기 등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놀이 도구가 되었다. 많이 놀다 보니 다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고 만약 다치더라도 회복이 빨랐다. 나 같은 경우도 가슴, 다리, 머리에 크고 작은 흉터가 셀 수 없이 많다. 속상하기보다는 잘 놀았다는 영광의 증표라 여겼다.
내친김에 시간을 건너뛰어 그 시절 아이로 돌아가 본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네타기를 좋아했다. 그네 발판에 친구와 내 발을 지그재그 올려놓고 서로 마주보면 특별한 사이가 되는 것 같다. 무릎과 엉덩이에 힘을 주어 그네를 탄다.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고 땅은 멀어진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짜릿한 느낌이 좋아 더 높이, 더 더 높이 올라간다. 파란 하늘과 바람 소리, 친구의 숨소리가 봄의 교향곡처럼 한데 어우러진다. 저 아래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순간 친구도 나도 우주도 하나가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오징어를 구경하거나 먹어본 적이 없다. 나중에 오징어가 얼마나 부드럽고 말랑하고 쫄깃한 해산물인지 알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내가 즐겨했던 오징어 놀이는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운동장 한가운데 오징어 모양의 놀이판을 그려놓고 치열한 눈치싸움과 밀치고 당기는 전쟁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옷이 찢겨나가는 지난함을 거쳐야 마침내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우리 앞에 오징어놀이보다 험난한 인생이 펼쳐지게 될 거라는 걸. 그때 끝까지 살아남은 아이들은 놀이가 아닌 실전에서도 승자가 되었을까?
고무줄놀이는 여자애들 전용이었다. 노래에 맞춰 팔딱팔딱 뛰는 동안 줄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종아리에 와닿는 팽팽한 고무줄의 느낌, 섬뜩하면서도 차갑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날것의 느낌 그 자체였다. 고무줄놀이의 압권은 남자애들이 와서 고무줄을 똑 끊고 도망칠 때다. 관심있는 여자애일수록 더 짓궂게 괴롭힌다는 미확인 소문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방해꾼을 쫓아가며 온갖 원망과 야유를 퍼붓지만 잡힐 듯 잡힐 듯하다 사라진다. 함께 적을 쫓아가는 동안 우리는 끈끈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공기놀이는 땅바닥에 자잘한 돌멩이를 깔아놓은 상태에서 옆에 있는 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따먹는 놀이다. 매끄러운 바닥에서 플라스틱 공기로 하는 놀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단단한 촉감, 공깃돌이 부딪힐 때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흙바닥에서 풍기는 푸근한 흙냄새, 공기놀이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놀이 중 으뜸이다.
덕은이는 놀이 천재였다. 특히 핀 따먹기를 잘했다. 여자아이들이 머리를 고정하는 데 쓰는 가느다란 실핀으로 하는 놀이인데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이 각자 핀을 낸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순서대로 큰 접시만 한 원에 핀을 던져 집어넣는다. 지금 생각하니 겨우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멀던지. 원 안에 들어간 핀은 던진 사람이 다 가져간다. 아슬아슬 금에 걸리면 심장이 덜컹거린다. 엄청난 집중력과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이길 수 있는 놀이인데 덕은이는 던졌다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싹쓸이한 핀을 훈장처럼 가슴에 주르르 달고 다니던 덕은이는 옆집에 살았다. 육 남매 중 맏이였는데 줄줄이 딸린 동생들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했는데 덕은이가 그 짐을 맡았다.
덕은이는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으로 돈을 벌러갔다. 명절 때 집에 오면 만났는데 그때마다 교복입은 나를 부러워했다. 어린 나이에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덕은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해서 나중에는 피하게 되었다.
나도 덕은이도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둘이 싸운 얘기가 나왔다. 워낙 강렬했던 탓에 덕은이도 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아 내 또래 애들이 많지 않았다. 마을 우물을 사이에 두고 위쪽은 윗디미, 아래쪽은 아래디미로 불렸는데 아래디미 애들은 덕은이와 나밖에 없었다. 아파서 결석을 하지 않는 한 항상 등하교를 같이했다. 오가는 길에 재미난 이야기도 하고 벌레도 잡고 무서리도 했다.
그러던 초여름 하굣길,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덕은이랑 말다툼을 했다. 티격태격하다 갑자기 덕은이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두 손으로 사정없이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냥 잡아당길 때와 위로 잡아 올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아아!”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덕은이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제발 살려달라며 사정했다. 아파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자 못 이긴 척 놓아주었다.
“야아, 너랑 안 놀아!”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힌 나는 너무 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덕은이가 가버리자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팅팅 부은 눈을 하고 집을 나서는데 덕은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으며 사탕 한 개를 쥐어주었다. 다시는 놀지 않으리라던 굳은 다짐이 사탕 한 알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둘 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친구들을 사귀고 관계를 맺고 갈등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하다가도 혼자는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양보와 타협에 이르게 된다. 덕은이와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 단단한 관계를 맺었다.
그네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세울 수 있을까. 어떤 나라에서는 그물로만 놀이터를 만든다고 한다. 건축가가 참여해 안전하면서도 모험이 따르는 놀이시설을 디자인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자마 지쳐 떨어져 잘 때까지 놀았으면 좋겠다. 그네를 탈 때 가슴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은 즐거움을 누리면 좋겠다.
선생님, 저 율이에요.
종현이와 저는 정 반대 성격이에요. 종현이가 <화요일의 두꺼비>에 나오는 워턴처럼 활발하고 모험을 좋아한다면 저는 사슴쥐처럼 겁이 많아요. 놀이 스타일도 완전 달라요. 저는 포켓몬이나 디지몬 카드 놀이를 주로 하는데 종현이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 놀이를 좋아해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놀이를 할 때 의견이 나뉘기도 해요.
친구랑 놀려면 자기 생각만 고집하면 안 돼요. 하기 싫지만 해야 할 때도 있고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면 안 될 때가 있어요. 종현이가 다친 날도 그랬어요. 원래는 강당에 가서 킥보드를 타기로 했는데 6학년 형들이 먼저 와 있었어요. 하는 수 없이 운동장으로 나갔지요. 그때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나무 막대기를 발견했어요.
“이거라도 던지고 받기 하자.”
저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는데 종현이가 말했어요. 막상 해보니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높이를 다르게 해서 놀자고 했어요. 종현이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고 저는 아래서 던졌어요.
그때까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우겨서라도 못 하게 했을 텐데.
종현이가 다친 걸 알았을 때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어요. 피가 줄줄 흐르고 선생님이 달려오고, 보건실에 가는 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그냥 무섭기만 했어요.
저녁에 엄마로부터 종현이가 이마를 일곱 바늘 꿰맸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놀다 보면 다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다음 날 종현이가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학교에 왔을 때 저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요.
“미안해.”
겨우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어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종현이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전화할 때 따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엄마는 저처럼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해서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도 엄마지만 종현이랑 놀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어요. 저는 종현이처럼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요. 마음을 여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예전처럼 종현이와 사이좋게 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가 미끄럼틀 위에 서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