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매 순간은 얼마 전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던 소중한 시간이다.
퇴사를 한다고 하면 으레 따라오는 질문은
"어디로(어느 회사로) 가세요?" 혹은
"그만두고 뭐 하실 거예요?"이다.
"이직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면서 여행이나 할까 해요. 이 기회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려고요. "라고 했다.
극 T이자 평소 가성비를 중시하시는 회사분은
"뭐 하러 스페인까지 가요. 그냥 서울-부산 왕복 걸으면 그 정도 거리 나올 텐데?" 했다.
하하하. 그래 그것도 좋겠구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아니면 순례길 다녀와서 이어서 도전해 볼까 생각(만) 했다.
걷기 3일 차, 아직까진 많이 힘들지는 않고 그냥 마냥 행복하다. 아름다운 풍경에 눈이 즐겁고 벌써 건강해진 느낌이다.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 그날의 나의 느낌, 만난 사람들, 그리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고 공유하고 싶어서 매일 인스타그램에 그날의 릴스를 하나씩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둘째 날 올린 릴스에 예전 직장 동생이
"누나, 멋지다!"
라고 댓글을 남겼길래 나는
"그냥 걷기만 하는 건데 뭘"
이라고 답변했다. 녀석이 다시 댓글을 달았다.
"그냥이라기엔 시간과 재화와 체력이 필요하고 용기 있는 결단의 결과인걸."
아, 그렇구나! 나는 그냥 걷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도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겠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의 여왕 5월 지금, 여기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산티아고 순례길은 일반적인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은 오기 힘든 곳이다. 이직을 하더라도 보통은 촉박한 일정으로 다음 회사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긴 여정의 여유를 갖기 어렵다.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를, 어쩌면 평생 이루지 못했을 수 있는 나의 버킷리스트의 한 가지를 이룬 것이다.
오늘은 팜플로냐라는 곳에서 숙박을 했다. 순례길의 여정은 공항이 있는 큰 도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은 시골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팜플로냐는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제법 큰 도시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기로 해서 일찍 도착했고 그래서 공립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들어갈 수 있었다.(공립 알베르게는 예약을 받지 않고 선착순인 경우가 많다.) 알베르게는 도미토리인데 대부분이 혼성이다. 이제 혼성 도미토리는 어색하지 않은데 이곳의 화장실과 샤워실이 남녀 구분이 없던 것은 좀 충격이었다. 음...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런 것들도 순례길 여정의 일부라서 즐겁게 받아들인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배트맨(순례길 첫날, 피레네 산맥 쉘터(Shelter)에서 마주쳤던 아저씨, D1 참조)과 눈이 마주쳤다. 걷는 속도가 다들 비슷하다 보니 한번 봤던 사람들은 또 만나게 되곤 하지만 배트맨 아저씨와는 조금 더 특별했다.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마을에서 숙박을 해도 그다음 날 길에서 마주치고, 같은 식당엘 들어가고, 오늘은 같은 숙소에서 묵는 데다가 화장실에서 마주치다니! 배트맨 아저씨는 삭발머리 장신에 외국인 치고도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한데 늘 무표정이어서 말 걸기 쉽지 않았었다. 나도 매번 마주치지만 특별히 아는 척하지 않았고 배트맨도 늘 쉬크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마주치다 보니 배트맨도 좀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너도 여기 묵는구나."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공기를 타고 후각을 자극하는 빵 냄새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들어갔던 카페에서 크루아상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여지없이 배트맨이 들어왔다. 우리는 드디어 통성명을 하고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는 폴란드에서 온 말릭이라고 했고 아들이 있는 아빠였다. 애초 계획은 자기 집에서부터 걷는 것이었는데 사정이 생겨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와! 그거 재밌었겠다! "라고 했더니
유럽에서는 자기 집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 며칠 후,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는 스위스 남자분을 만나기도 했다. 말릭은 그렇게 거의 3개월째 걷는 중이고 6월 중순, 아들 생일 전까지 돌아가는 것이 목표라면서 지금 속도로는 조금 빡빡할 것 같다며 이제는 속도를 내기 시작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날 이후로 말릭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배트맨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빠르게) 사라졌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나중에 또 만날 줄 알았는데 못 만나게 되면 아쉽고,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 마주치게 되면 너무 반가운...
나는 여기서 걸어서 집까지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대신에 인천공항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 볼까 생각했었다. 약 70 km 가 안 되는 거리라 충분히 걸을 수는 있을 텐데 인천공항에서 서울 들어오는 곳은 도보로 오는 경로는 (다행히) 없어 보였다.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 돌아가면 무더위가 기승일 거라 어쩌면 안도했다.
D3: Larrasoana ~ Pamplona, 15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