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진 봉주흐, 오늘부턴 올라
어제 한바탕 소동을 겪고 이제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몸을 움직인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라 일어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어제의 비 때문인지 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느껴지고 발걸음도 가볍다. 운동화는 마르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배낭에 달고 걸어본다. 운동화가 내 허벅지를 툭툭 치지만 나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박자에 맞춘다.
오늘부터 남은 일정은 스페인, 오늘도 은근 산길 구간이 길었다. 이런, 오늘은 샌들 신었고 스틱도 없는데 어제 비 탓인지 웅덩이가 꽤 있었다. 가파른 돌 내리막길도 고비였다... 괜찮다. 시간도 많고 넘어져 봤자 양말이나 옷이 좀 더러워지겠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 물 웅덩이 따위 두려워하지 마!
어제와는 다르게 일행은 아니더라도 같이 걷는 이들도 있고 Camino 어플들 사용에도 익숙해져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길가의 나무와 꽃을 보며 눈 정화도하고 머리칼을 살짝 날리는 바람도 온전히 느낀다. 날씨도 좋고 시골길이 참 정겹다. 숲길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도 맑은 날씨만큼이나 경쾌했다.
인생에서 누군가 옆에 있다는 자체로 힘이 될 때가 있듯이,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낯선 길에서는 위안이 된다. 길을 앞지르거나 마주칠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 인사를 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겹게 Buen Camino! 라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Buen Camino, 그리고 웃음이면 순례길에서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오늘은 하루는 걷는 내내 감사함으로 마음이 충만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Mindful running school의 코치님은 '충만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한다. 나는 그 '충만하다'라는 느낌이 늘 궁금했었다. 사전적으로는 어떤 감정이 가득 차 있음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알겠고, '즐겁다' '슬프다' '화난다' '행복하다' 이런 감정은 알겠는데 사십 평생 살면서 그 많은 감정 중에 '충만함'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작년 Mindful running 케냐 리트릿에서 나는 다른 러너들에게 "달릴 때 충만함을 느껴본 적이 있어요? 어떤 기분인가요? 저는 솔직히 한 번도 없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케냐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자연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완전히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감사하고 행복함에 오늘 하루 충만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떤 좋은 감정이 충분히 꽉 차서 벅차오르는 느낌, 바로 그것이다. 신기했다. 나는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꽉 찬 느낌이라니. 그저 말없이 혼자 걷기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행복하다 느낄 수 있다니.
D2: Burguete - Larrasoana, 23.9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