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_부엔 카미노,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어제까진 봉주흐, 오늘부턴 올라

by 쑴이

어제 한바탕 소동을 겪고 이제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몸을 움직인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라 일어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IMG_5236.jpeg 부르게테의 아침


어제의 비 때문인지 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느껴지고 발걸음도 가볍다. 운동화는 마르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배낭에 달고 걸어본다. 운동화가 내 허벅지를 툭툭 치지만 나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박자에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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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남은 일정은 스페인, 오늘도 은근 산길 구간이 길었다. 이런, 오늘은 샌들 신었고 스틱도 없는데 어제 비 탓인지 웅덩이가 꽤 있었다. 가파른 돌 내리막길도 고비였다... 괜찮다. 시간도 많고 넘어져 봤자 양말이나 옷이 좀 더러워지겠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 물 웅덩이 따위 두려워하지 마!

IMG_1041.jpeg 어떻게 건너야 할지 두뇌를 풀가동한다.
IMG_1039.jpeg 내가 발톱이 없지 발가락이 없냐??!!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첫날 고생으로 양쪽 발톱이 빠졌다.)


어제와는 다르게 일행은 아니더라도 같이 걷는 이들도 있고 Camino 어플들 사용에도 익숙해져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길가의 나무와 꽃을 보며 눈 정화도하고 머리칼을 살짝 날리는 바람도 온전히 느낀다. 날씨도 좋고 시골길이 참 정겹다. 숲길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도 맑은 날씨만큼이나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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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누군가 옆에 있다는 자체로 힘이 될 때가 있듯이,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낯선 길에서는 위안이 된다. 길을 앞지르거나 마주칠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 인사를 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겹게 Buen Camino! 라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Buen Camino, 그리고 웃음이면 순례길에서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IMG_5240.jpeg 이 길의 끝까지 순례길 비석은 순례자와 함께 한다.



오늘은 하루는 걷는 내내 감사함으로 마음이 충만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Mindful running school의 코치님은 '충만함'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한다. 나는 그 '충만하다'라는 느낌이 늘 궁금했었다. 사전적으로는 어떤 감정이 가득 차 있음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알겠고, '즐겁다' '슬프다' '화난다' '행복하다' 이런 감정은 알겠는데 사십 평생 살면서 그 많은 감정 중에 '충만함'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작년 Mindful running 케냐 리트릿에서 나는 다른 러너들에게 "달릴 때 충만함을 느껴본 적이 있어요? 어떤 기분인가요? 저는 솔직히 한 번도 없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케냐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자연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완전히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감사하고 행복함에 오늘 하루 충만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떤 좋은 감정이 충분히 꽉 차서 벅차오르는 느낌, 바로 그것이다. 신기했다. 나는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꽉 찬 느낌이라니. 그저 말없이 혼자 걷기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행복하다 느낄 수 있다니.


아... 이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는구나...


D2: Burguete - Larrasoana, 23.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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