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_구름 속을 걷다.

불안하니 조급해지고, 조급하니 실수를 한다.

by 쑴이

(조금 긴 에피소드)

첫 단추를 잘못 꼈다.

그냥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들 가는 대로 따라다니면 되겠지 하고 무작정 왔다. 일단 숙소부터 꼬인 듯했다. 순례길 시작 이틀 전에 예약을 하다 보니 숙소는 중심지보다 한참 떨어진 곳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게다가 야간 버스로 도착해서 너무 피곤했던 나는 샤워 후 아무것도 못한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세상에, 초저녁부터 한 번도 깨지 않고 오전 7시까지 잤다. 같은 숙소에 머문 다른 사람들과 조식을 먹었는데 이 분들은 모두 순례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들은 여유가 있었구나, 나는 그럴 때가 아니었는데..)

간단히 조식을 먹고 중심지로 걸어갔다. 나는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순례자 여권(Credencial de Peregrino)도 사야 하고 짐도 맡겨야 했다. 첫날이 프랑스 길 전체 일정에서 가장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산맥을 넘어야 해서) 등산에 취약한 나는 고민 없이 짐을 맡기기로 했다.

IMG_0961.jpeg 숙소가 좀 멀긴 했지만 눈부시게 예쁘고 조용한 곳이었다. (방에서 본 창밖 뷰)


여권 발급받고 짐을 가지러 다시 숙소로 가는 길, 너무 거리가 한산한 게 싸했다. (애초에 숙소에서 짐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다. ㅠ) 어제 북적이던 모습과 너무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정말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나 혼자.... 덩키 서비스(짐 배달)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오늘 짐들은 픽업이 끝났다며 기사님을 만나서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식당 이름을 알려주며 거기서 기사님을 찾아보라는데 길도 못 찾겠고 본인이 픽업 기사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난감했다. ㅠ 진땀을 흘리고 몇 번을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한 끝에 간신히 기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짐도 털어 냈고 그래, 이제 시작해 보자 마음을 다 잡아 보려는데 아침부터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순례자 사무실에서 받아 온 지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그냥 내일 시작할까 하는 맘도 들었지만 짐을 이미 부쳤으니 어쨌든 숙소에 도착해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걷기 시작하자! 걸으면서야 한국에서 다운로드해 왔던 순례길 어플에서 지도와 실시간 나의 위치를 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0시가 다 돼서야 걷기 시작했기에 혼자인데 길을 잃을까 무섭고 핸드폰 배터리가 중간에 나갈까 조마조마하고 부쳤던 짐은 잘 도착할까, 불안했고 늦게 출발해서 조급했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1.5km 정도 지났을 때 잘못 가고 있음을 알아채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원점부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지도에 자세히 쓰여 있었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것이다.


IMG_0966.jpeg 어찌어찌 루트 안으로 들어왔다. 그다음부터는 길 찾기는 쉬웠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전에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다가 핸드폰 충전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아침에 바게트 한 조각 먹은 게 다였기 때문에 물과 샌드위치라 불리던 것(바게트 빵 안에 하몽 몇 조각 들어있는)을 하나 샀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패스할까 했었는데 이곳에서 화장실도 안 가고 핸드폰 충전 안 했으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ㅠ

IMG_0978.jpeg 사실상 이곳이 마지막 나의 휴식지였다. 본격 오르 기 전 만난 식당


올라가도 올라가도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도가 높아지면서는 안개와 구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숙박 주인아저씨가 오늘 비 온다고 했었다. (큰일 났네.) 혼자 걷는 숲길에서 천둥번개까지 치기 시작하면서 겨우 찾은 여유와 평정심은 무너졌다. 그래서 뛸 수 있는 구간은 뛰었다.

심지어 비옷은 큰 배낭에 있는데 ㅠ 배낭은 없어서 몸은 가벼웠지만 쉬지 않고 비를 맞으며 산길을 네댓 시간 걷다 보니 너무 지쳤었고 잠시 비를 피하면서 쉬고 싶은데 쉴 만한 곳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번개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너무 겁이 났다. 사진을 찍을 여력도 물을 꺼내 마실 상황도 되질 않았고 다리도 너무 아팠다. 다행히 지도에 나와 있던 쉘터(Shelter)와 몇몇 사람들을 발견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쉘터,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네 명 더 있었다.


쉘터에서는 비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잠시나마 비를 피해 물을 마실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방 속에서 찌그러져버린 먹다 만 초라한 샌드위치도 젖은 손으로 우걱우걱 먹었다. 바게트 때문인지 이 상황 때문인지 목이 메었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여자 두 분, 키가 엄청 큰 아저씨와 혼자 온 젊은 여자애 한 명과 이 상황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 흩어졌다. 비가 와서인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어두워지려 했다. 그래서 나는 비가 멈추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빨리 내려갈 것을 선택했다. 나는 제일 먼저 오두막을 나섰다. 키가 엄청 큰 아저씨는 샌들을 신고도 검은색 우비를 휘날리며 어느새 나를 추월했다. 뒷모습이 흡사 배트맨을 연상케 했던 그 아저씨와 최대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왠지 아저씨 따라가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하)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이 불어서인지 등산로가 시냇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조급함 때문에 실수는 했지만 그 불안함 덕분에 보통 7~8시간 걸린다고 하는 거리를 6시간 만에 완료했다. 최소 3시간은 비 맞으며 산길을 걸었는데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음에 안도했다. 조금 오버하면 영화에서 볼 법한 위기 상황을 연상케 했고 이런저런 상황들을 상상하며 걸었다.


Roncesvalles에 도착해서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젖은 바람막이를 벗었는데도 비를 오래 맞아서인지 온몸이 떨리는 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신발 안은 빗물로 홍수가 났고 나는 첫날부터 양쪽 엄지발톱을 잃었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다른 분들의 신발은 뽀송하길래 물어보니 비를 하나도 안 맞거나 다 내려와서 비가 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5시 반에 출발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을 내려와서 Roncesvalles에서 숙박한다. 나는 또 숙박을 구하지 못했기에 다음 마을에서 자야 했다. Roncesvalles 밥을 먹고 나니 어두워졌고 택시를 탔다. ㅠ 여전히 오들오들 떨리는 몸으로 3 km를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IMG_0989.jpeg 새 신발인데..... 시작부터 더러워짐;;;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산맥을 넘다가 조난사고가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날씨를 꼭 확인하자!!! 피레네 산맥 길이 제일 좋았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그저 무사히 넘은 것에 감사하고 대신 두고두고 이야기할 에피소드를 남겼다.


오늘도 꿀잠 확정이네!


D1: Saint-Jean-Pied-de-Port ~ Roncesvalles, 24.2km (헛걸음하고 오전에 이것저것 볼일 보느라 운동어플 보니 34km 걸었다)

Roncesvalles ~ Burguete, 2.9km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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