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_여기 오길 참 잘했다.

하루 일과는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다.

by 쑴이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하루는 매우 단순해졌다.

알람은 따로 맞출 필요가 없다. 이른 아침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나도 그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면 된다. 어차피 더 누워있어 봤자 출발만 더 늦춰질 뿐, 눈을 뜨면 몸을 곧잘 일으킨다. 전날 밤에 싸놓은 배낭은 침대 옆에 두고 눈을 뜨면 옷만 입고 대충 채비를 마친 후 숙소를 나선다. 6시 반에 나오면 밖은 아직도 밤인 것처럼 깜깜하고 5월 중순이지만 새벽공기는 제법 쌀쌀해서 콧물이 나고 손이 시리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일출을 여기서는 매일 아침 보고 있다. 매일 다른 풍경과 어우러진 일출을 마주하는 하루는 활기차다. 아침에 2시간 즈음 걷고 한 두 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고 나면 문을 연 카페들이 보인다. 거기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로 매일 라테에 크루아상을 먹는데 한국에서는 좋아하지만 살찌니까 자제하는 음식이 빵인데 여기에서는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다시 2시간 즈음 더 걷다가 중간에 화장실을 갈 겸 점심을 먹는다. 점심 메뉴도 매번 비슷하지만 땀을 흘리고 먹는 꿀 같은 휴식과 점심은 늘 맛이 있었다.


KakaoTalk_Photo_2025-09-15-19-50-47.jpeg 야채도 중간중간 챙겨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3시간가량을 더 걸으면 대부분 계획했던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숙소에 짐을 두고 마을을 돌아다니다가(어떤 곳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라 딱히 볼 것도 없다.) 이른 저녁을 먹고 씻고 (사나흘에 한 번씩은 빨래를 하고) 내일 루트를 결정하고 9~10시면 잔다.


하루 일과와 매일 식단은 매우 단조롭다. 그런데 신기하게 지루하거나 심심하거나 질리지 않는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않아도, 스마트폰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기에서도 유튜브도 볼 수 있고 게임을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예쁘게 꾸미지 않아도 좋다. 아니, 오히려 여기는 꾸밈이 어울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게 '멋'인 곳이다. 옷은 서너 벌이면 충분하다. 구멍 난 양말을 신어도 신발이 더러워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조금은 헝클어지고 젖은 머리에 편안한 미소를 띠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간밤에는 옆 침대 아저씨들이 밤 새 내내 코를 고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내 위층 침대를 썼던 여자분은 큰 일교차에 감기에 걸렸는지 기침을 많이 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살짝 졸음이 와서 땅을 보고 걷고 있는데

"어제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잘 못 잤지?"

라고 흰머리가 살짝씩 보이는 아저씨들 3명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제 내 옆 침대 코골이 주범들이었다!

"너희들이었어?? 엄청났지. 하하. 그래도 덕분에 대신 오늘 밤은 아주 잘 자겠어!"

나도 여유 있게 농담하며 웃었다.


여기서는 고요한 밤이란 없다. 매일 밤 코를 고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코 고는 소리가 이제 자장가처럼 들려서 코 고는 소리에도 잠 잘 잔다고, 집에 돌아가더라도 이제는 코 고는 소리 안 들으면 잠 못 잘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IMG_1161.jpeg 우리 인생에도 이정표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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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Photo_2025-09-15-19-50-54.jpeg 걷고 찍고 걷고 찍고 감탄했다.


오늘은 구름과 하늘이 너무 아름답게 어우러진 걷기도 참 좋은 날씨였다.


한동안 마음속 가득했던 미움, 욕심, 조급함, 자만심, 좌절과 실망...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이렇게 단순함과 평온함 속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것을 얻어 갈지 궁금하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날지 기대가 된다.


여기 오길 참 잘했다.



IMG_5273.jpeg 이 여유로움이 좋아서 눈이 부신 창밖의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D4: Pamplona ~ Puente La Reina, 24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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