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 나는 용서를 하기보단 잊고 싶어.
갈수록 점점 더 좋다. 그래서 아직 갈 길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어제는 구름이, 오늘은 꽃과 하늘이 가는 길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었다. 매일매일 구름은 다른 모양이고 계절마다 나무와 꽃들은 다른 모습일 테니 이곳을 여러 번 온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어떤 상황에 오느냐 어떤 마음으로 왔느냐 누구랑 왔느냐에 따라서도 매번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름 모를 꽃들을 관찰하면서 몇 종류인지 세어보며 걸었다. 노란색, 빨간색, 흰색 꽃들이 많았는데 언뜻 봐선 똑같은 노란색 빨간색 꽃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른 꽃이었다. 오늘 길에서 본 꽃들만 20가지가 넘었다. 평소에 길가에 핀 꽃들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라고 생각하면서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다시 현대 도시인의 건조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 나는 끝이 보이지 않은 들판의 꽃들에 정신이 팔려 걷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제부터 마주치던 60대로 추정되는 한국인 아저씨가 꽃을 찍는 내 뒷모습을 몰래 찍었다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진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분은 프랑스 순례길이 3번째인데 산티아고 순례길 책을 쓰고, 지금은 산티아고 스쿨을 운영하며 이번에 처음 인솔자로서 왔다고 하셨다.
여기서 한국인을 만나는 게 낯선 일은 아니지만, 어제부터 유독 한국 사람이 많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열네 명의 팀을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나는 팀도 아니었는데 중간중간 마주칠 때면 “쉴 때는 신발을 벗어 발을 건조하게 하라”거나 “이 구간에서는 이런 풍경을 놓치지 말라”면서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어제는 ‘용서의 언덕‘을 넘었다. 순례길을 배우자와 걸었다는 블로거의 글을 봤었는데 용서의 언덕을 넘으면서 서로를 용서했다고 했다. 귀엽고 유머스럽게 쓰시긴 했었지만 여러 해 부부로 함께 하면서 얼마나 많은 서사가 있었겠는가. 친구끼리 순례길에 왔다가 여행 초반부터 다퉜는데 용서의 언덕을 건너면서 화해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용서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용서 못 할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의 언덕에 멈춰서 잠시 쉬어간다. 발걸음을 절로 세우는 풍경이기도 하고 마침내 오르막 구간을 지나 정상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았고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마음속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는 중인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나는 사진 한 두장만 찍고 바로 걸음을 돌렸다. 아마 ‘용서'라는 단어가 아직 불편하기 때문 일 것이다.
나는 ‘용서‘에 대해 지난 몇 달 동안 생각해 왔다. 사람들이 말하길 미워해봤자 나만 손해라고들 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나도 잘 안다. 상대방은 타격감 없는데 나 혼자 안 좋은 감정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은 나만 괴로운 일이었고, 하필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이라 괴로웠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을 내가 먼저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고 상대방이 모르는 나만의 용서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분노와 증오의 감정 속에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다. 내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기엔 아직 미성숙하고 내 그릇은 크지 않나 보다. 그냥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잊고' 싶었다. 하지만 잊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나는 떠나왔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가 용서가 안된다는 그 친구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었었다. 집도 내놓고 회사도 다 정리하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아예 떠나겠다고 했었다. 그러니 나한테는 휴가로 가능한 일수만큼만이라도 같이 걷자고 했다. 그런데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우리는 얼굴도 마주 못할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는 여전히 회사를 잘 다니고 있고 집도 정리했었다가 결국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웃기게도 집도, 회사도 정리하고 떠나온 건 나였다.
생각해보지 않은 전개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작은 기억까지 떠올려 생각했다. 곱씹으며 다시 화를 불러오려는 게 아니라 오늘까지만 생각하고 앞으로 다시는 생각은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를 화나게 했던 것, 실망하고 슬펐던 순간들... 좋지 않은 감정과 기억들, 작은 것까지도 한 걸음 한 걸음 이 길에 버리고, 이 바람에 날려버려야지. 이 길을 마치고 돌아가면 이제 더는 생각하지 않으리, 여기서 매듭을 짓겠다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꽃 길을 걸을 나를 위해!
D5: Puenta la Reina ~ Estella, 21.9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