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기, 비우고 또 나를 채우는 시간
여전히 나는 혼자 걷고 있다. 이제 혼자 왔던 사람들도 제법 삼삼오오 같이 다니는데 말이다.
꽤 지쳐있었나 보다. 나는 타인과 이야기를 하고 어울리기보다는 혼자가 좋았다. 내가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어쩌다 누가 말을 걸 때도 있지만 잠깐의 대화다. 신경 써야 하는 사람도, 깊은 인간관계도 없으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밀린 생각들을 했었다. 가끔씩 지나치는 다른 순례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몇 살일까 추측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 자신과 이 길에만 집중했다.
한국에서도 분명 생각할 시간은 많았었는데,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산 거지? 회사에서나 회사를 오가면서는 일 관련된 것을 생각했을 것이고 짬짬이는 일상적인 일에 대한 생각이나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었나 보다. 자기 전에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SNS를 뒤적이거나 유튜브 영상을 틀어 놓고 잠이 들었었다. 그냥 하루하루 그렇게 살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고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 중요한 생각들은 연말 연초에나 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아니면 생각하는 것도 피곤 해졌는지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기만 했다. 생각을 멈추니 이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저 사람들은 왜 여기를 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지난 며칠 생각만 했다고는 했지만 무슨 대단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매일매일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 외에 같이 걷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진 것이.
오전에 도착한 한 마을에서는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그냥 멈추지 않고 가야겠다 하고 어느 식당 앞을 지나는데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아침부터) 맥주 한잔씩을 하고 계셨다. 팜플로냐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의 인연인데 자주 마주치기도 하고 유쾌하셔서 만날 때면 늘 반가운 분들이다.
"굿 모닝, 너도 맥주 한 잔 할래?"
하면서 맥주 한 잔을 사주셨다.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짧은 만남이 반복되면서 그렇게 우리는 일행 아닌 일행이 되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20km 전후를 걷고 있는데 보통 7시가 되기 전에 출발하다 보니 1시 정도면 목적지에 도착하곤 한다. 순례길을 빨리 완주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1시에 걷기를 멈추기엔 나에게 너무 이른 시간이다. 읽을 책도 없고 이 시간에 도착하면 낮술이나 하면서 사람들 구경하는 것 외엔 할 것이 없는데... 카페를 변경해 가며 와인 한잔 씩을 마시고 안 되겠다 싶어서 숙소에 와서 씻고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오늘은 나보다 어려보이는 여자분들하고만 한 방을 쓰나 보다. 미국에서 온 여자분 2명과 호주에서 친구끼리 온 2명 그리고 덴마크 여자분 1명 그렇게 나까지 6명이었다. 오랜만에 젊은? 여자들끼리만 있으니 조금 신이 났던 나는
"우아, 오늘은 조용히 잘 수 있겠다! 매일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밤에 몇 번씩 깼었는데."
하며 다 같이 웃었다. 정말로 이 날 밤은 조용히 자긴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이야기했던 내가 코를 골았을지 모를 일이다.
6명이 침대에 둘러앉아 각자 하는 일과 이름, 그리고 어떻게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게 됐는지 언제까지 여행하는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눴다. 내 옆 침대를 썼던 덴마크 여자애는 원래 혼자 왔었는데 여기서 호주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나의 순례길 첫날, 피레네 산맥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잠깐 천둥과 비를 피했던 쉘터(Shelter)에서 같이 조난당할 뻔했던 젊은 여자애가 오늘 밤 내 옆 침대를 쓰는 덴마크 여자였다! 와, 너무 반가웠다. 사실 그 여자애는 처음부터 일행을 만들고 싶어 하던 눈치긴 했다. 쉘터 도착 전에도 비 오는 산길에서 나한테 말을 시켰었는데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휘리릭 뛰어가버렸었고, 쉘터에서도 먼저 이런저런 말도 시키고 했어서 어쩌면 자연스럽게 같이 다닐 수 있었긴 했는데... 나는 뭐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던 걸까... 처음 며칠은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었다. 그래도 그날 무사히 하산하고 다정한 호주여자분들을 만나서 같이 잘 다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야기도 잘 통하는 애들이었어 며칠은 같이 다녀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미 다음 도착할 마을과 숙소도 예약을 했었고 이 친구들과는 조금 일정이 맞질 않았다. 호주 여자애들은 짧은 일정으로 와서 며칠 후부터는 속도를 내기 위해 자전거로 완주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꼭 한 번은 다시 만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음 날 아침, 웃으며 안녕했다.
"See you somewhere on the road."
나의 바람과는 달리 배트맨에 이어 이 친구들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나만의 시간에서 벗어나서 이 길과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과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레였다.
D6_Estella ~ Los Arcos, 21.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