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달려봤니?
내가 걸었던 산티아고 프랑스길은 780 ~ 800 km 정도 되는데 보통 30 ~ 34일 정도 간다길래 시간 많은 나는 34일 정도 예상하고 왔다. 평소 주 3~4회 달리기를 했었지만 순례길 걷기를 시작하고는 전혀 뛰지 못했었어서 혹시라도 늦어진다 싶으면 '그냥 뛰지 뭐'라고 생각했었다. 배낭도 있고, 낮엔 덥고 산길이나 돌이 있는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많다 보니 발이라도 접질리면 완주하지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걸을 구간을 어플에서 확인해 보니 평지가 길어 배낭은 운송서비스에 맡기고 달리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갓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큰 배낭은 운송을 맡겼지만 물이랑 간단한 소지품이 들어있는 작은 보조 배낭은 뛸 때마다 들썩거렸고 오랜만에 뛰는 거라 그런 건지 운동화가 무거운 건지 잘 달려지지는 않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뛰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씩 리듬이 잡히면서 오랜만에 느끼는 달리기의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시원했고 길 양 옆으로 들판은 이슬이 내려앉아 한껏 싱그러웠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인데 여행지에서 가끔 살면서 잊지 못할 것 같은 풍경과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오늘 아침이 바로 그랬다.
이렇게 신나 본 게 얼마만인가? 초등학교(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해질 무렵 엄마가 빨리 들어오라고 부를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던 그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평소에는 코호흡을 하며 주로 편안한 달리기를 하지만 오늘은 숨이 헐떡거렸고 덩달아 쿵쾅쿵쾅 뛰는 심장도 신나는 나의 마음과 같아서 이 힘듦마저 즐길 수 있었다. 사실 달리기의 고됨 때문에 나타나는 신체반응일 텐데 눈부신 햇살과 신선한 아침공기에 벅차올라 숨이 가쁘고 심장이 나내는 느낌을 받았달까...
걷기보다 빠른 박자, 쿵쿵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에 앞서 걷던 순례자들이 뒤를 돌아보았고 내가 뛰고 있는 모습을 보자 미소를 보였다. 어제 카페에서 합석해서 잠시 대화를 나눴던 캐시와 리처드 부부도 손을 흔들며 응원해 주었다.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은 의사라고 했다. 나는 캐시에게 순례길 걸으면서 무슨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했다. 그녀는 난민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아주 충격적이었다. 나는 오직 나 자신과 내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나는 참 편협했었구나... 이 부부는 독실한 크리스찬인데 몇 년 전부터 매해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다닌다고 하셨다. 많아봐야 나보다 열 살쯤 위일 텐데,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런 여유와 깊이를 가질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을 돌 볼 능력도, 경제적 여유도 있어 베풀며 살 수 있는 삶이 참 행복해 보였고 인자하고 다정했던 표정과 말투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깨닫게 되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또한 순례길 여정의 큰 부분이고 내가 얻어 갈 수 있는 배움이라는 것을...
순례길 첫날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비는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아직까지 불편함 없이 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었다. 시골길,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일 새로운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제 나누었던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과 오늘의 희망찬 기분이 겹쳐서 한껏 신나는 하루였다.
내 인생, 오늘만 같아라!
D7: Los Arcos ~ Logrono, 27.9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