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 D9_경로 이탈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게 제일 편하긴 하지.

by 쑴이

내가 한 달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한 달 넘게 걷기만 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미없거나 못하겠으면 중간에 그만하고 유럽 다른 곳 여행하면 되죠 뭐. 일주일 해보면 느낌 오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딱 일주일 걷고 나니 순례길을 이탈할 일이 생겼는데 지루해서도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산티아고 프랑스 길은 대부분 생장 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파리로 와서 며칠 머물면서 예전 회사분들을 만났다. 예전 나의 보스가 빌바오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순례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추천하셔서 나는 순례길을 마치고 가볼까 했었다. 지도를 보니 내가 지금 있는 로그로뇨에서 가면 더 가깝고 동선도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선글라스를 사야 하는 중요한 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 이탈이라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매일매일 짐을 풀고 싸고 이동하니 뭐 하나는 잃어버릴 수도 있겠네, 그중에서도 선글라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잃어버릴 줄이야. 내가 좋아하는 선글라스여서 마음이 쓰렸지만 여권이나 핸드폰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오전 7시인데 벌써 사람들은 숙소를 떠나고 없었다. 남자분들은 일어나서 10분이면 채비를 마치고 나가기도 한다. (엄청난 스피드다). 나는 더 누워있어도 되었지만 알베르게의 체크아웃 시간이 이르기도 하고 이제 습관이 되어서인지 늦잠이 자 지지 않는다. 어제 꽉 찼던 신발장에는 첫날부터 더러워진 내 신발만이 초라하게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쓸쓸하게 남겨진 내 신발이 꼭 나 같아서 남들 갈 때 그냥 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로그로뇨 구시가지의 텅 빈 평일 아침은 차가웠다. 빌바오로 가는 기차 시간이 아직 남아서 도시를 무작정 걸어 다녔는데 추우니까 콧물이 나오고 괜히 마음도 시렸다. 다행히 문을 연 카페가 있어 늘 그렇듯 따뜻한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허기를 달래고 온기를 찾을 수 있었다.


빌바오 기차역, 스테인 글라스가 웅장했다.


아침에 시간 여유가 있어서 망정이지 기차역 찾는데 한참 걸려서 겨우 기차를 타고 빌바오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내가 상당히 길치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새삼 깨달았다.

순례길에서는 볼 수 없는 출퇴근하는 오피스맨들이 보이고 길에는 흑인들이 노상에서 기념품을 파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이 빌바오는 내가 알던 스페인 보통의 도시 모습이었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나는 너무 배가 고팠는데 대부분 식당이 7시까지 브레이크타임이라니 절망적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여기에서도 이른 저녁을 먹는데 7시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고 타파스에 와인으로는 나의 허기를 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구겐하임 미술관 바로 앞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은 열려 있어서 오늘만큼은 조금 럭셔리한 저녁을 즐겼다. 그리고 오랜만에 호텔에서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니 그것 또한 좋았다.

미술관도, 선글라스도 경로 이탈의 이유가 됐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굳이 ‘남들 하는 대로 꼭 해야 하나?’라는 청개구리 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 정답은 없으니 사실 남들과 다르게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
구겐하임 미술관 앞 꽃으로 만든 강아지


순례길 걷기를 시작하고 오늘이 가장 적게 걸은 날인데 가장 피곤했다는 게 놀라웠다. 한 거라고는 기차 타고 식당을 왔다 갔다 밖에 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순례길은 자연 풍경을 보면서 정해진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배낭을 메고 '목적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했기 때문인듯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기대 이상이었고 시골길 걷다가 이틀 연속 도시를 만나니 반갑기도 했지만 나는 순례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서 걷고 싶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 고요함,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평온하긴 했지만 말이다.




로그로뇨로 돌아가는 기차 옆자리에는 진주목걸이를 한 우아한 백발머리 할머님이 두꺼운 책을 읽고 계셨다. 그러다 가방에서 먹거리를 꺼내더니 나에게 자꾸 음식을 권하셨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할머니들은 비슷한가 보다. 처음에는 사양(말 안 통하니 손사래)했으나 자꾸 거절하는 것이 실례일 것 같아 하나 받아먹었다. 나는 ‘딜리시어쏘‘라고 어설픈 스페니시를 써보며 웃었다. 할머니는 이 기차를 타고 종점인 바르셀로나까지 가시는 듯했는데 내가 잘 내리는지 여러 번 뒤돌아서 확인하셨다. 햇살을 품은 기차도, 할머니의 마음도 참 따뜻했다.


할머님이 건네주신 촉촉한 빵


다시 만난 로그로뇨


산티아고 순례길, ‘우리’는 거대한 그룹과 같아서 따로 걷고 있지만 나름 일정을 같이 하고 있는 멤버들이 있다. 일주일이 넘게 걷다 보니 절반 가까이는 이제 한 번쯤은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뒤로하고 이틀을 뺀다는 것이 살짝 걱정되었다.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께는 한 10일 후쯤은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며 10일 후에 보자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까지 걸었던 것보다 하루 5km씩은 더 가야 한다.

일탈의 즐거움도 있긴 하지만 쫓아가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일탈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덕분에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즐겼잖아!


퇴사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이 시간도 내 인생에서 계획에 없던 작은 일탈이지만 괜찮다.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D8, D9: Logrono ~ Bilbao, 기차여행 (순례길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