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나라 스페인
이틀 놀고 다시 순례길 시작이다.
오늘부터는 뒤쳐진 거리를 조금씩 만회해 보겠다고 배낭을 운송서비스에 맡기고 달렸다. 오래 달리진 못했지만... 해가 뜨면 일단 걷는 것도 힘들다.
빌바오 다녀온 이틀 사이 갑자기 기온이 올라간 느낌이고 햇살도 많이 뜨거워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6시 전에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죄다 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전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두 번의 전학으로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세 군데나 다녔는데 내성적이었던 나에게 낯선 느낌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원래 나의 '무리'들은 다 앞질러 가고 새로운 얼굴들만 보인다. 다시 순례길 첫날이 된 느낌이었다. 갑자기 어린 친구들도 많이 보였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면서 정 없이(눈인사 없이) 그냥 휙 지나간다. 그래, 저만할 때는 또래끼리 무리 지어서 자기들끼리 노는 것이 좋을 나이지. 바뀐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그 덕에 뙤약볕 아래서 걸었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고 며칠 동안 그냥 다녔었는데 어제 선글라스를 사길 참 잘했네.
햇살이 강하면 눈이 부시고, 그래서인지 이게 현실이 맞는지, 뭘 잘 못 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오히려 선글라스라는 인공적인 장벽을 통해서 바라본 세상이 더 현실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을 때도 있다. 날것의 세상을 경험해 볼 기회도 별로 없고 다 같이 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니까 그것이 현실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한국 여자분을 만났는데 숙소에서 한국분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한국 어머님 특유의 넉살로 먼저 다가와 저녁으로 소중한 라면 하나를 나눔 해주셨다. 2주 만에 먹는 한식?이었다. 그리고 오늘 숙소에도 그분이 계셨다. 우리는 숙소 식탁에 앉아서 어제에 이어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나눈 긴 대화였다. 정확한 나이는 묻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나이가 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딸이 대학생이라고 하는 것을 미루어 봐서는 나보다는 나이가 있는 듯했다. 나는 매번 하는 질문을 했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하세요?"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긴... 나는 생각 안 하려고 걷는데! 나는 일부러 빨리 걸어요. 힘들어서 잡생각 안 들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잠깐 길에서 마주쳤었는데 나를 앞질러 훨씬 일찍 숙소에 도착해있었다. 심지어 나는 아침에는 조금 뛰었었는데 말이다!
20대에 결혼해서 남편 내조하고 딸을 키우고, 딸이 대학을 가고 나면 자유롭게 혼자 여행할 거라며 몇 년 전에 순례길을 계획했었었다고 했다. 그런데 예약을 하려던 때, 시어머님이 갑자기 편찮으셔서 병간호를 하느라고 이제야 오게 되었다고 했다. 20년 넘게 가정주부로 가족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 혼자만의 여행은 그분에게 어떤 의미일까? 해외여행을 별로 안 해보고 영어공포증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서 오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영어도 잘하시고 예약이나 길 찾기 등을 혼자서 척척 잘 해내셨다. 가정주부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어플이나 인터넷에 익숙하고 영어를 어릴 때부터 접한 젊은 사람들도 혼자서 해외여행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마당에 70년대 생에 집에만 계시던 분이 맞나 신기했다. 분명 그냥 집에만 있는 가정주부는 아닐 것이다.
그분은 내 이름을 물으시더니 그다음부터는
"쑴이씨~"
라고 불렀고, 나는 그분을 내 멋대로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했는데 맡긴 짐이 도착하지 않아 씻지도 못한 채 카페에서 와인도 마시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근처 공원에 앉아 있었다. 보통은 배낭에 짐운송 서비스 봉투(내 연락처와 도착할 숙소 주소가 적힌 운송비를 넣은 봉투)를 부착하고 입구에 내놓으면 내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배낭이 도착해 있는데 말이다. 로비 직원에게 부탁해서 알아보니 어제 내가 묵었던 숙소에서는 오늘 픽업 요청이 들어오지 않아서 누락되었다고 했다. 그 말인 즉, 내가 미리 픽업 업체에 왓츠앱을 통해 픽업 예약을 하든지 알베르게 직원을 통해 예약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같은 숙소에 픽업 신청을 했던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숟가락 얹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픽업 기사에게 부탁했고, 그 동네에서 픽업해서 볼일 보고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 마저도 고마운 일이긴 했지만 보통은 씻고 누워서 편안하게 내일 일정을 확인하거나 휴식을 취할 시각인데 씻지도 못하고, 그래서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있자니 조금 짜증이 났다. 사실 굳이 따지면 (그런 서비스 운영방식을 몰랐던) 내 잘못이기도 한데 말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걷기도 했고 날이 뜨거워서 그런지 힘들었어서 예민했다. 결국 저녁 9시가 다 돼서야 배낭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만큼은 나의 급한 성격이나 예민함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여행 중에 있을 법한 작은 차질은 여유롭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여행을 중단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아프거나 신변의 위협이 되는 일도 아니다. 큰돈을 잃은 것도 아니고 단지 조금 오늘 불편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잊을 일이다.
나는 마흔이 되면서 변한 게 있다면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뀌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의 단점을 자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큰 발전이다. 어떤 날은 오히려 나를 너무 채찍질하는 것 같아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아야지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바뀌지 않는 나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한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면 남은 시간 동안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다 보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더워진 날씨도 함께 걷는 사람들에 익숙해져야겠지...
우리 일행을 다시 만날 때까지 덥지만 열심히 걷자!
D10: Logrono ~ Najera, 29.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