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_산티아고 순례길,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배낭도 지루함도 다리 아픔도 아니다. 작열하는 햇볕이다.

by 쑴이

뜨거운 날씨의 연속이다. 어제부터 가장 힘든 것은 손바닥만 한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활한 평야만 펼쳐질 뿐 당분간 숲길은 없어 보인다.

오늘로 순례길 1/3 즈음 왔는데 초반 무렵엔 '할만하네'라고 생각했었으나 어제오늘은 약간 더 많이 걷고 있기도 하고 날이 뜨거워지니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평소땐 이렇게 햇볕 아래 있을 일도 없지만 이렇게 오래 있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지하주차장,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는 건물들... 쇼핑몰, 그리고 밖으로 나와도 가로수, 건물 숲 사이는 늘 그늘이 있었으니까.


이런 경험을 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힘듦도 즐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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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209.jpeg 이 길의 끝은 어딜까... 언제부턴가 그 생각만 하면서 걷고 있다.
IMG_2207.HEIC 오늘은 계속 이런 길이었다.


문득 어제 만났던 언니가 힘들게 걸으면 아무 생각이 안 든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 내가 그랬다. 힘드니까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늘이라도 나오면 잠시 쉬겠는데 몇 km 채 그늘이 보이지 않았고 오늘따라 바람도 전혀 불지 않았다.

같이 걷는 사람들도 말없이 각자 갈길만 갔다. 다들 표정에 여유가 없는 게 힘든 건 나뿐이 아닌가 보다.

바람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가 좋아 지금까지 오면서는 음악을 듣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음악이 필요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IMG_2224.HEIC 온통 파랑과 초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후 2시 전후면 모두 걷기를 멈춘다. 너무 더워서 (정확하게는 뜨거워서) 한낮에는 걷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9일 후에 '일행'을 만나기 위해 조금씩 더 걷는 관계로 오늘은 3시 반 넘을 때까지 걸었다.

와, 마지막 5km는 너무너무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동시에 대단한 경험을 했다. 어릴 적 보던 그림책 속을 걷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힘들어서 정신이 혼미? 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황홀함에 취한 듯 신기한 광경을 지나왔다. 미술관에서 보던 그림들도 떠오르게 했다. 작가들이 그림에 담은 풍경을 파노로마로 펼쳐 놓으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길 위에는 나 혼자 뿐이었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푸르른 것들과 땅 위의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머물 곳은 숙박시설이 2개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식당을 찾았다.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카드게임을 하고 계셨다. 우리네 시골 노포에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낮 막걸리를 걸치시며 화투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술 내기 게임을 하시는지 판이 끝나고 나니 환호성과 아쉬움의 탄식이 동시에 들리더니 다 같이 술을 주문하셨다.

오늘은 힘들었어서 그런지 바게트 빵 하나 감자튀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와인도 한잔 더 시켰다. 많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단어는 '그란데' 밖에 없어서

"그란데~ 그란데~ 포르 파보"

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정말로 아주 많이 따라주셨다. 사실 그란데는 '크다'라는 크기를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으로 이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였지만 척하면 척 다들 알아듣는다. 나는 이 날부터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잔 와인을 주문할 때면 매번 "그란데~ 그란데~" 외쳤다. 스페인은 와인이 저렴하니 그 정도 인심쯤은 당연하게 통했다.

이른 저녁을 천천히 즐기는 동안 어제 같은 숙소에서 보았던 어린 친구들은 식당에서 음료를 마시며 잠시 쉬더니 또 이동할 채비를 했다.

"와, 너희 더 가려고? 어디까지 갈 건데?"

"글쎄... 걸음이 멈춰질 때까지?"

역시 젊음이 좋긴 좋구나....


IMG_2238.jpeg 양이 적지 않았는데 남김없이 다 먹었다.
IMG_2244.HEIC 빨래는 서너 시간만 널어놓아도 바짝 마른다.


IMG_2235.HEIC 밖을 보며 늘어지는 오후도 꽤 괜찮다.


오늘 꽤 고되었다. 잔뜩 땀을 흘리고 나서 배를 채우고, 씻고 나오니 이제 살 것 같았다. 젖은 머리를 말림 겸 거실에 앉아서 평화로운 밖을 내다보는데 작은 행복감이 몰려왔다.


순례길 걷기 10여 일이 지나간다. 매일 아침 숙소를 나오면서 오늘은 어떤 길을 만날까 여전히 기대됨과 동시에 더 이상 뭐 새로울 게 있을까 우려되는 마음도 있는데 오늘도 역시 그 생각이 무색하게 또 새로운 모습의 길을 보여주었다.

매일매일 새롭고 감사하다.


D11: Najera ~ Castildegado, 32.9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