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_짧게 드리운 그늘도 살짝 부는 바람도 감사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기

by 쑴이

오전 5시 10분.

순례길 여정에서 한 번도 알람을 맞춰 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준비하면 됐지만 오늘은 몇 명 없는 작은 숙소라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자동적으로 눈이 일찍 떠졌다. 다른 사람들이 깰까 봐 손에 집히는 것들을 챙겨서 고양이 걸음으로 방을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 핸드폰의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거실에서 침낭을 접고 짐을 쌌다.

어제는 너무 힘들었어서 오늘은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더 걸어야겠다 싶어 서둘러 나오니 5시 30분. 사방이 고요하고 깜깜했다. 마을에 집이 몇 개인지 손으로 셀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은 마을의 새벽은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가로등이 없어지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해졌다. 오늘은 많이 걸을 거라 큰 배낭은 운송서비스를 맡겼는데 그래도 다행히 보조가방에 헤드랜턴을 챙겨 나와서 계속해서 걸을 수는 있었다. 사람들이 헤드랜턴을 챙기래서 가져왔는데 그동안은 쓸 일이 없었지만 안 가져왔으면 아쉬울 뻔한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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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264.HEIC 멀리서 해가 뜨려고 꿈틀거린다

길도 어둡고 혼자 무서운 상상을 하다가 길을 잘 못 들었다. 이런, 생각보다 많이 잘 못 왔네. 오늘은 많이 걸어야 되는데 그래서 더더욱 돌아가는 길이 아까웠다.

길 위에 안내 화살표가 잘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가끔 멍 때리면서 나오는 길대로 걷다가 잘 못 가고 있을 때가 있어서 한 번씩 순례길 어플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뭔가 좀 이상한데? 싶을 때 어플을 보면 여지없이 잘 못 가고 있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발한 덕에 예쁜 일출도 보았다.

해가 뜨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조금 많이 걷고 작은 마을에서 묵어서 다른 사람들과 박자가 틀어진 탓이다.


KakaoTalk_Photo_2025-10-10-21-18-55.jpeg 해가 뜨니 좋긴 하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엄청 뜨거워질 것이다.
IMG_2393.jpeg 이 정도 그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감사함’이었다.

퇴사 후 급히 준비한 여행이었지만, 파리에서 꼭 만나고 싶었던 두 분이 있었다. 그래서 순례길의 출발지로 가기 전, 파리에서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한 분은 전 전 직장 상사였다. 퇴사 후 한 번도 연락드리지 못했지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너무 높은 분이라 쉽지 않았다. 가끔씩 생각만 했었는데 예전 회사분을 통해 운을 띄운 후 용기를 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레스토랑 문을 들어서자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하필 미국 출장에서 막 돌아와서 아직 시차적응도 안 됐고 피곤하셨을 텐데 흔쾌히 시간을 내주시고 반갑게 맞아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첫맛은 쌉쌀하지만, 바닥엔 달콤한 연유가 가라앉아 있는 돌체라테처럼 차가운 인상과 카리스마 뒤에 따뜻함이 있는 분이다.


다음 날에는 전 회사 동료를 만났는데 내가 코로나 때 입사했던 관계로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늘 오빠처럼 챙겨주던 분이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회사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이후에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특히 내가 퇴사를 고민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다. 조언도 많이 해주셨고,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도 연결해 주며 도움을 주셨다.


파리에서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두 분을 만났던 여운은 꽤 오래갔다. 순례길을 걷다가도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 인스타그램 릴스로 지인들이 보내준 응원의 메시지에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 곁에서 살아왔구나.’

그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그들의 응원을 떠올리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내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특히 파리에서 만난 두 분처럼, 나보다 어린 누군가에게 존경 받고 따뜻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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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참 더웠고, 길었다.

어제는 내내 밀밭이었는데 오늘은 나무도 간간이 보였다.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었고 우거진 숲길은 아니어서 큰 도움은 안 되는 그늘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싶었다. 더위를 식혀줄 만큼의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뺨에 바람도 살짝 느껴졌다.

걸으면서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더니 어쩌다 만나는 짧은 그늘도, 아주 잠깐 부는 바람도 너무 반갑고 감사했다.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괜찮다.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밥 먹을 먹고나니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며칠 동안 그리 덥더니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D12: Castildegado ~ San Juan Ortega, 33.9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