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울 때도 있긴 합니다.
간밤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가 많이 왔다.
어제 너무 일찍 나갔더니 깜깜했고 무서웠던지라 오늘도 눈이 일찍 떠졌지만 침대에서 조금 뒹굴거렸다. 옆 침대 중국 여자애는 밤늦게까지 옆방 사람들과 놀았던 거 같던데 일어나 보니 이미 나가고 없었다.
조금 늦게 나온다고 나왔는데 6시 전이라 그런지 아직은 어두웠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땅이 너무 질퍽거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동굴같은 깜깜한 숲길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제 같은 숙소에서 은퇴 후 혼자 왔다는 한국 여자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는 오늘 아침에 너무 일찍 출발했더니 사람도 없고 너무 깜깜하더라고요. 좀 무서웠어요."
"아유... 혼자 다니는데 가급적이면 너무 일찍 다니지 말고 사람들 다닐 때 나가요. 여기가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할 수 있는 건 조심해야지. 여기서도 사건은 있고 최근에도 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네? 무슨 사건이었는데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아니야~ 모르는 게 나아. 아무튼 혼자 다니니까 조심히 다녀요. 내가 딸 키우니까 우리 딸 생각나서 걱정하게 되네."
그 말을 듣고 나니 궁금했다. 아마도 그분은 내가 알면 괜히 더 무서울까 봐 말씀하시지 않은 것 같은데 공포영화도 무서울 줄 알면서 보게 되는 것처럼 자려고 누웠지만 손은 스마트폰 검색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최근 사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사건들이 있기는 했다.
길 양쪽으로 우거진 수풀 사이로 작은 동물들이 움직이는 건지 '스스스~ 스스슷' 같은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기도 하고 쫄보가 되어서 걷고 있는데 전날 밤에 찾았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순례자인척 하면서 접근했다가 강도로 돌변해서 소지품을 빼앗고 경찰 신고가 지체되도록 손발이 묶어 놓은 채로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온갖 상상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작은 불빛이 보였다. 멀찌감치에 우두커니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움직임이 없길래 내가 잘 못 본 건가 하며 다시 보아도 사람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낯선 사람은 반갑기보다는 무섭다. 설마 저 사람도 강도는 아닐까, 남자인가 여자인가, 강도라면 어떻게 도망가는 게 좋을지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미동도 없는 우두커니 서있는 '무서운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백인 남자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와이프 기다리는 중이야."
그 남자는 무표정으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깜깜하고 무서운 숲 속 길에 아내를 뒤에 두고 혼자서 먼저 걸어갔다는 건가? 어쨌든 나는 미동도 없고 심지어 표정도 없던 미스터리했던 남자를 지나쳐서 후다닥 걸었다. 나중에 해가 뜨고 중간에 걷다가 그 미스터리 남자를 다시 마주쳤는데 정말 아내로 보이는 여성과 있긴 했다. 부부라고 해서 무조건 같은 속도로 걸을 필요는 없고 나 역시 일행이 있더라도 잠깐씩 혼자 걷는 것도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 상황에서는 아내를 챙겨서 같이 걷지 않은 남자가 신기했다. 문화 차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후 아무렇지 않게 잘 다니는 부부를 여자분이 참 대인배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과 맛있는 것을 먹을 생각을 하며 힘을 내서 걸었고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배도 고팠지만 며칠 전부터 고대했던 한식당이 있는 곳이라 숙소 체크인도 안 하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어제 숙소에서 무서운 이야기를(정확하게는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던) 하셨던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아주머니께 이야기했고,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오늘도 내가 너무 일찍 나가서 걱정했다고 하셨다. 아주머니는 이미 3개월 동안 여행 중이셨고, 순례길도 포르투갈부터 시작해서 이미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고 하셨다. 이제는 지겹다면서 부르고스에서 순례길 여정을 끝낸다고 하셨다. 우리는 식당에서 24시간 동안의 인연을 종료했다.
그리고 한식당에서 순례길 초반에 만났던 한국 단체분들도 만났다. 부르고스에서 연박하며 도시를 즐겼다고 하셨다.
한국인들을 보고 싶으면 이 식당(두 번째 소풍)으로 가면 된다. 내 맘대로 '언니'라고 부르던 분도 숙소에서 만나서 이 식당에서 오픈런해서 같이 저녁도 먹었다. 오랜만에 외국에서 먹는 한식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맛있긴 했고 또 언제 한식을 먹을지 몰라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부족하지 않게 시켜 먹었다. 하루 종일 걷는다는 이유로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순례길에서 누리는 작은 기쁨 중 하나다.
부르고스는 정말 엄청난 곳이었다. 도시에 막 도착했을 때, 예쁘고 적당히 크고 분위기가 좋아서 다음에 따로 방문하고 싶었다. 조용하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왔더니 180도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어디서 나왔는지 사람이 사람이, 엄청난 인파가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같은 곳이 맞는지 조용했던 도시는 야외 콘서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과연 열정의 나라 국민들이 맞았던 것이다. 에너지와 흥이 대단했다.
안 그래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잠들기 어려웠는데 음악소리는 거의 아침이(4시) 되어서야 멈췄다. 며칠 아주 작은 마을에 있다 와서 그런지 참 적응이 안 되는 밤이었다.
다음에는 순례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그냥 놀러 오고 싶은 곳이다.
D13_San Juan de Ortega ~ Burgos, 26.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