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참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갈 길이 멀다. 이제 30km 걷기는 예삿일이 되었다.
일찍 일어나서 채비를 마쳤건만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문을 닫는 시간만 있는지 알았더니 아침에 문 여는 시간도 따로 있다고 했다. 굳게 잠긴 철문 앞에서 괜히 일찍 일어났다는 허탈한 마음을 다 잡고 앉아서 스낵을 먹었다.
오전 7시, 드디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갈길을 서둘렀다.
새벽까지 이어졌던 음악소리는 멈추고, 도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고 청량한 새울음 소리만 들렸다. 나는 아직 차가운 물기를 머금은 새벽공기 한 움큼을 들이마시고 오늘의 첫 발을 내디뎠다.
평소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마음이 조금 급했다. 아침에 스낵도 먹었겠다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한국 단체팀이었다. 혼자 다니는 탓에 내 사진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이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는 분부터 인솔자로 오신 분까지 내 사진도 몇 장 찍어주셨고, 남은 일정에 대해 여러 가지 팁을 주셨다. 인솔자분의 나이를 들었을 때 많이 놀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대체로 높은 편이라 걸으면서 부모님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이분은 우리 엄마보다 두 살 아래셨다.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활기차고 더 건강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분과 함께 오셨다는데 우리 부모님도 이 분들처럼 사이가 더 좋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다.
우리 부모님은 건강하신 편이고, 엄마들의 단골 멘트인
"너희가 다 크면 이혼할 거다. "
"너희 아빠랑 여행 가는 거면 나는 안 가련다. "
라고 하셨지만 지금까지 하우스 메이트로 백년해로? 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본인들 인생을 더 즐겼으면 좋겠지만 부모님도 각자의 인생이 있기에 나는 그분들의 인생을 존중한다.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은 순례길 걷기의 첫 번째 준비물은 '건강'이라는 것이고 우리 부모님이 내가 이 길을 걷는 것처럼 조금 더 건강하셨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점심 무렵, 나를 앞질러 갔던 한국 단체분들이 체크인을 기다리느라 숙소 앞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은 조금 멀어서 오늘은 여기에서 머문다고 하셨다.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한국에서 이미 숙소를 다 예약하고 오셨고 일정을 여유롭게 계획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와는 순례길에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10 km는 더 갈 것이고 아마도 사나흘 정도 먼저 산티아고에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완주하라는 따뜻한 응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분들을 뒤로하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내리쬐는 햇볕 때문인지 그분들이 단체로 보내는 눈길 때문인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마음이 괜스레 시큰거렸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반갑게 만났다가 쿨하게 헤어진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들어가고 싶은 식당이 있나 보면서 계속 걸었다. 지도상으로는 식당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문을 열지 않았었고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마을을 벗어나 버렸다. 다음 식당이 있는 마을까지는 좀 많이 걸어야 하는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도 고팠지만 발가락에 물집도 생긴 것 같고 심지어 물집이 터졌는지 쓰려왔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내가 지금 무슨 사서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사람들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지 않냐고 이야기하던데 나는 발가락 양말을 신고(발가락 양말은 순례길 필수템이다.) 그 위에 양말을 한 겹 더 신기 때문인지 나는 그동안은 물집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샌들 신고 그냥 양말을 신어서인지 물집이 생기고야 말았다. 방심한 탓이다.
그늘도 없고 앉을 곳도 없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긴 싫고... 하지만 일단 나는 발가락에 밴드를 붙여야만 했다. 빈집처럼 보이는 곳의 디딤돌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 발로 어정쩡하게 서서 신발과 양발을 벗고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개가 나타나서 엄청나게 짖기 시작했다. '아... 제발... 잠깐만... (나 너무 힘들어)'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영세븐티로 보이는 남자분이 나오셨다. 개를 달래며 나에게도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Vino'는 정확하게 알아듣고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배낭을 챙겨 들었다.
"뭐라도 마실래? 와인? "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몇 시간만에 잠시나마 시원한 곳에 앉을 수 있었다. 바디랭귀지, 어플을 이용해서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이곳은 와인을 만드는 곳이고 본인이 만든 와인이라며 라벨 없는 병에 담긴 와인과 치즈를 주셨다. (위험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는 그냥 시골이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술을 마시면 걷는 게 힘들 거 같아 물집이 생긴 발가락에 응급처치를 마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가 '식당이 있냐'라고 손짓을 해 보여서 그랬는지 치즈도 덩어리 채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의 배고픔은 치즈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시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도 오늘의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걷다 보면 멀찌감치 마을이 있음을 상징하는 성당(십자가)이 보이는데 지도상에는 가까운데 도무지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지나니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 묵을 마을은 마치 숨겨진 곳처럼 언덕을 내려가니 모습을 드러냈다.
샌들을 신고 오래 걸은 탓인지 발이 으스러질 것 같은 느낌에 절뚝거리며 숙소에 도착했다. 의도치 않게 점심도 먹지 못했고 식당을 지나친 탓에 화장실도 못 갔고 물도 떨어졌을 때였다.
오늘 걸어온 길도 예뻤고, 수녀님께 기도도 받았고 길에서 반가운 사람들과도 인사하고 시골 할아버지의 도움도 받았던, 너무 좋은 경험을 한 하루였지만 동시에 힘들고 긴 하루였다.
힘들어서인지 (여기와서 처음으로) 입맛을 잃었고 일단 씻고 잠시 쉬었다.
아무리 피곤도 빨래는 하고 짐은 싸놓고 자야 해서 빨래를 걷으러 나갔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바람에 날리는 옷가지들을 걷으며 순례길 2주째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해질녁 부는 바람처럼 인생에서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마음속에 은은하게 남았다.
D14: Burgos ~ Hontanas, 31.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