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_흔들릴 뿐 떨어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현실 속 나의 시간은 멈춰있고 여기에서의 나의 시간은 내가 걷는 속도다.

by 쑴이

6월 2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걷고, 그렇게 보름을 걸었더니 날짜도 요일 개념도 없어졌다.

좋은 점이 있다면 시간뿐만 아니라 안 좋았던 기억들과 현실적인 고민들도 함께 잊고 지낸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현실 속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많이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런 것들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지나간 안 좋은 기억들과 돌이킬 수 없는 일보다는 나 자신과 나의 인생 전반에 대한 생각을 하며 걷게 되었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현실에서의 나의 시간은 멈춰있고 여기에서의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얼음!"

을 외치고 현실에서 떠나와서 여기에서는 나만의 시계를 본다. 오늘, 내일 그리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도착, 그 생각만 하면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 나의 시간은 나의 걷는 속도로 간다. 그리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처럼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한껏 즐기는 중이다.




점심을 먹으러 들른 식당에서 화장실을 갔다가 놀랬다.

화장실 거울 속에는 오지체험 한 달 정도하고 온 여자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거울을 제대로 못 보고 나오는 날이 많아서 잘 몰랐다. 그 사이 그을리고 핼쑥해진 얼굴, 푸석한 머릿결... 한국 돌아가면 금융치료를 제대로 해야겠구나 싶음과 동시에 순례길 일정의 절반을 왔구나 실감했다.

이렇게 큰 나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살짝 흐리고 바람이 불어서 걷기에 좋은 날씨다.

바람의 감촉을 느끼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귀 기울였다. 바다의 파도는 물이 쪼개지는 웅장하면서 날카로운 소리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다소곳한 작은 파도소리 같다.

길가에 마르고 키가 큰 나무들이 바람에 꺾일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나뭇잎들은 반짝거렸다. 바람에 흔들리고 휠지언정 꺾이거나 나뭇잎 한 장 떨어지지 않는다. 가느다란 몸이지만 유연하면서도 강한 덕분이겠지.

나무뿐만이 아니다. 가녀림과 청순의 대명사 들꽃들조차 드세게 부는 바람에 쓰러질듯하다가도 다시 일어난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바람에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바람의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초록색과 누르슴 한 색들의 풀들이 물결을 치며 장관을 이뤘다. 초록의 파도를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다시 걸었다. 햇볕만 내리쬐지 않아도 걷는 게 한결 수월하구나.

이 마을의 유일한 숙소

빌바오 다녀온 이후 원래 일행? 들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왔다. 이렇게 걸으면 이틀 후 즈음에는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 오늘 묵을 마을에는 숙소가 한 군데라 걷다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같은 날 순례길을 시작했던 사람들부터 최근 만났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익숙한 얼굴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어쩌면 여기에서도 조금은 애쓰고 있다.


D15: Hontanas ~ Boadilla de Camino, 28.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