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도 이제 후반전
100세 시대라고들 하는데 병원에 누워있거나 몸과 정신이 온전할 나이를 90세로 본다면 나는 정확하게 나의 인생의 중간에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딱 좋은 나이다.
엄청나게 치열했던 경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격정적이었던 내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 시작 전에 잠시 벤치에 앉아서 목을 축이고 후반전 작전을 짤 시간.
나의 지난 3~4년은 조금 힘이 들었다. 인생을 좌지우지할 큰 일은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안 좋은 일들과 사건 사고들이 있었고 그런 일들이 계속 생기니 좀 지쳤다고 할까. 매를 한번 세게 맞은 것보다 강도는 낮아도 같은 곳을 지속적으로 맞는게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안 좋게 엮였던 인연의 고리도 끊어냈고, 회사도 그만두었으며 집도 정리한 채 36L 배낭만 짊어지고 여기에 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가면 모든 걸 재정비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중 2, 3 때 가벼운 사춘기를 겪었고, 20대 중후반에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40대 중반에 그동안의 내 인생에 대해 돌아본다. 나는 내가 원하던 인생을 살고 있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순례길도 어느덧 후반전이다.
중간에 버스를 타고 점프(중간 도시/마을을 생략)하는 사람, 아예 접고 이탈하는 사람(아주 드물지만)도 있고 다리나 발목에 뭔가 칭칭 감거나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제 조금씩 지치기 시작하는 시점에 접어들었나 보다.
사실 나도 보통 여행을 할 때 늘 2주가 넘어갈 즈음되면 체력도 고갈되고 짐을 싸고 풀고 이동하는 것이 지겨워졌었다. 그리고 한식도 슬슬 그리워지면서 집에 가고 싶어지곤 했다. 여기에서도 그런 시기가 된 듯하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 생활이 싫은 것도 아닌데 그저 처음만큼은 신나지 않는달까(어쩌면 당연하지만).
내일모레는 도시가 나오니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면서 보낼 생각이다. 전반전이 끝나면 후반전을 위한 작전회의 겸 휴식 시간이 필요하니까...
마을에 도착해서 여느 때처럼 맥주 한잔 마시며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연히 그저께 같은 마을에 머물렀던 호주 남자분을 식당에서 마주쳐서 같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분도 혼자 왔는데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슬랭을 쓰는 호주영어는 알아듣기 어려운데 독대라 대충 아는 척하면서 오케이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도 없으니 대화에 온전히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대화가 길어지면 피곤해져서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 친구와는 좀 이야기하다가 빨래를 해야 한다는 둥 핑계를 대며 자리를 먼저 떴다.
나이는 30대 중반정도로 보였는데 나는 그에게 왜 굳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왔냐고 물어보았다.
"나? 운동도 할 겸 살 빼려고..."
이 역시 의외의 대답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로 여기에 온다. 나는 순례길을 오기 전에는 나처럼 퇴사하고 다음을 도약하기 위해 휴식하러 오거나 정년퇴직 후 남은 인생을 계획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배우자나 가까운 사람을 잃고 오는 사람들도 꽤 있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이유로 여길 찾는다. 오늘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모두가 거창한 이유로 여기 오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건 여기는 '그냥' 온 사람은 없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목적지인 산티아고를 향해 나만의 순례길을 걷고 있다.
D16: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24.4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