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_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 지금은 중요해

인생에도 그런 게 있을까?

by 쑴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걷는 것도, 처음에 적응 안 됐던 도미토리 알베르게도 이제 일상이 된 듯 편안하다.


오전에 걸으면서 문득 어제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일본 할아버지가 떠올라 걱정이 되었다. 혼자 오셨다는 76세 할아버지의 다리는 띵띵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내가 가지고 있던 탄력붕대를 반쯤 잘라 드리긴 했지만 그 다리로 걸으실 수 있으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의자에서 쉬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다리는 좀 괜찮으세요?"

"어제 붕대 감고 잤더니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어요. 좀 쉬면서 걸으면 괜찮을 거 같아요."


할아버지는 일본인이지만 캐나다에서 살고 계셔서 영어를 잘하셨고, 심지어 스페인어도 구사하셨다.

"무슨 생각하면서 걸으세요?"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몇 km 남았는지 그런 거에만 집중하고 걸어요."

초반에 만났던 한국 '언니'와 비슷한 대답을 했다. 나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반보다는 더 많이씩 걷고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서는 나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걷기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도착 한두 시간을 남겨 놓고서는 몇 걸음 가고 핸드폰 보고 또 고작 몇 걸음 가고 한숨 쉬고 하는 중이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80을 바라보는 저 나이가 되면 더 이상 고민할 것들이 많지 않을 듯하다. 자식들도 다 자신들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고 일이나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거의 없을 것이며 그저 본인과 배우자의 건강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꼭 완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건강해 보이시긴 했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건강이 허락할지 모르니까 이번 산티아고 여정은 할아버지에게 큰 의미일지 모르겠다. 할아버지와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건강하게 완주하라는 응원의 말을 남기고 앞서가면서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파스라도 더 드리고 왔어야 했나 맘이 쓰였다.


어제부터는 노랑꽃길이 시작되었다.
바람이 불면 길에 달콤한 꽃향기가 퍼진다.


언제부턴가 새롭게 보이는 얼굴이 있었는데 키가 크고 똑같이 생긴 동양인 여자분들인데 중국계 캐나다인으로 삼자매라고 했다. 며칠 전에 내가 너무 힘겹게 발을 옮기고 있으니

"괜찮아? 물 마실래?"

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내가 오만 죽상을 하고 있긴 했나 보다.

자매들은 홍콩 출신으로 어릴 때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지금은 셋이 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매해 6월이 되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서 며칠을 같이 걷고 생활하다 돌아간다고 했다. 이번엔 작년에 걷다가 만 곳부터 시작했고 올해도 산티아고까지는 가지 못하고 일정 구간까지 가고 내년에 또 돌아올 거라고 했다. 괜찮은 아이디어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어릴 적에만 잠시 우애가 돈독했던, 둘 다 서울 살지만 잘 만나지 않는 우리 언니를 잠깐 떠올렸다. 아마도 우리는 같이 여기 오면 싸우고 돌아가지 않을까...

끝까지 삼자매의 이름과 얼굴을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 날을 마지막으로 다시 그들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올해 일정은 그 근방에서 마무리되었다보다.



라벤더인가 보다


오늘은 목적지에 도착하니 2시 반이었다. 한창 햇볕이 뜨겁거워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 있어 행복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피자를 먹었고 여유롭게 화이트 와인도 두 잔 마셨다. 슈퍼마켓이 따로 있는 마을은 아니라서 오늘 묵는 알베르게가 식당이면서 슈퍼라 이곳에서 내일 아침에 먹을 바나나와 물을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짐더미를 뒤적거리며 하도 바스락대니까 옆에 있던 애가,

"뭐 잃어버렸어? Something important? "

라고 물었다.

"음...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 말이야, 지금은 쫌 많이 중요해.“

“칫솔!"


아무리 찾아보아도 칫솔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침에 이를 닦고 세면대에 두고 화장실 다녀와서 그냥 나왔나 보다. 큰일이다. 여긴 슈퍼마켓도 없는데.

원래 덤벙대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아침(새벽)에 매일 깜깜한 곳에서 짐 싸니까 자꾸 뭘 흘리고 다닌다. 그러다 정말 다행스럽게 기내에서 나눠준 칫솔이 배낭 작은 주머니에서 나왔다.

'이걸로 이를 닦으면 잇몸에서 피날 것 같군.'

하며 버릴까 하다가 챙겨뒀던 건데 이게 이렇게 요긴히 쓰일 줄이야. 일단 오늘 밤은 이걸로 버틸 수 있겠다.


인생에서도 그런 게 있을까? 평소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어떤 상황에서는 중요한 것.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 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중요했다.


D17: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29.7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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