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_나는 내려놓은 것이지 포기한 게 아니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은 참지 않을 것이다.

by 쑴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왔다. 오늘은 40 km 넘게 걸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과 재회하는 날이다. 아직까지 40 km는 도전해 본 적이 없어서 큰 배낭은 운송서비스를 맡기고 비장한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있지만 오늘 새벽하늘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옅은 파란색 셀로판지를 통해 바라보면 이런 느낌일까. 어쨌든 밀밭과 오솔길에 어우러지는 새벽하늘은 보며 오전 내내 혼자 걸었다.


IMG_3075.HEIC 그림 같은 하늘
IMG_3077.HEIC 해가 뜰 무렵이 되면 붉은 기도 있어야 하는데 그저 파랗다. 신기했다.
IMG_3159.HEIC 점심은 계란 풀은 신라면을 먹었다. 스페인 시골에서 외국인이 끓여주는 신라면인데 고향의 맛이 났다.

혼자서 말없이 걷다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어서 들어가고 싶은 식당을 물색 중이었다. 오, 입갑판에 한글로 '신라면'이라고 적혀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한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오다 보니 알베르게 겸 식당에서 가끔 라면을 파는 곳들이 있는데 여기는 예전에 유튜브에서도 본 적이 있는 곳 같다. 신라면을 먹으려고 들어왔지만 서빙되고 있는 다른 음식들도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는 음식이 다 비슷비슷해서 고민이 필요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메뉴 고민을 했다. 그래도 여기서 라면을 먹지 않으면 또 언제 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라면과 맥주를 주문했는데 놀랍게도 어릴 적 학교 앞에서 먹던 분식점 라면의 맛이었다. 단지 내 입맛의 라면과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메뉴들 때문에 오늘 이 알베르게에 묵고 내일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IMG_3160.jpeg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영락없는 중년인데, 내가 요즘 그렇다.
IMG_3238.jpeg 귀여운 나무들
IMG_3222.jpeg 귀여운 나무들 2
IMG_3210.jpeg 이런 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IMG_3200 2.HEIC 그늘도 없고 너무 힘들었는데, 이 표시를 보고 '큭'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근데 진짜 많이 남아있긴 했다.)


아침부터 하늘이 예쁘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하늘이 예뻤고 아주 맑은 날씨, 즉 눈은 즐겁지만 몸은 힘든 날.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차도 거의 지나가질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렇게 너무 좋은데 고통스러웠다.

오늘이 두 번째였다.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황홀한 풍경과 이 순간에 홀린 느낌. 나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다리 아프다~~!"

"아~~~! 너무 덥다고오~~~!"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자 주인공이 설원에서 외치는 '오겡끼데쓰까'의 여름버전으로...

'러브레터'가 잔잔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이라면 나는 '서바이벌'과 '발악'의 느낌이 강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내가 왜 그때 소리를 질러댔는지 사실 이해는 잘 되지 않지만 아마도 힘드니까, 그리고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 소리 지를 용기가 솟구친 게 아닐지.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이었지만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 걸을 수 있었다. 끝이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당장은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고통은 결국 나를 무너지게 할 것을 알기에 대개 그런 경우는 나는 과감하게 '내려놓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포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몇몇은

"네가 왜 그만두냐."

"그럼 네가 지는 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도 알았고 그 말들이 살짝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지만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내 의지로 해결되지 않을 것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것들을 인내하며 버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 생각했고 나는 나의 하루하루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이것은 경쟁도 아니고 '누가 이기나 그래 해보자'라고 고통을 감내하기엔 내 시간이 아까웠다.


점심을 먹었던 마을에서 목적지인 Reliegos까지는 13 km. 중간에 쉬어 갈 마을이 없다. 그래도 이 길에 끝은 있으니 나는 지도에서 줄어들고 있는 km를 보면서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IMG_3220.HEIC 너무 행복한데 또 너무 힘들고


그렇게 넋 놓고 길고 긴 가로수길을 걸었는데 중간 체크를 해보니 아까 옆길로 방향을 틀었어야 했다. 오늘은 가야 할 길도 멀고 이미 힘든데 1 km 가까이 헛걸음을 했다니. 나에게 화가 났지만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걸었다. 근데 또 길을 잘 못 들었다.

'나 정말 큰일이네. 정신 차리자.'


구글맵을 켰다. 순례길 어플이 매우 정확하고 잘 되어 있지만 이제 나름 요령이 생겨서 이렇게 길을 잘못 들었거나 지름길을 찾고 싶을 때 구글맵도 켜보기도 했다. 잘못 들은 길을 쉽게 만회해 본다고 구글맵에 보이는 작은 길로 가고 있는 데 있어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원래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풀이 자라서 길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거친 풀을 가르며 흔적만 살짝 남은 길을 통과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철길이 나왔는데 굴다리 위로 난 철길 옆 난간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이 경로는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서 발이 푹푹 빠지는 수풀을 헤집고 (혹시나 뱀이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바지에 가시들도 붙고 요란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에 원래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냥 잘 못 온 길을 돌아가서 원래 가야 할 길로 갔던 것이 더 나았을까. 요령 내지는 나의 전략은 실패였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지는 이 에피소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IMG_3251 2.HEIC 나를 위해 따로 이탈리아 아저씨가 만들어 준 파스타

5시가 넘어서야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며 나를 기다리던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은 먼저 식사를 하시겠다고 메시지가 왔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마을에 도착했지만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마을 입구에서 로컬 와인을 한 병과 과자를 샀다.


오늘 걸을 거리는 지도상으로는 40 km였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서 헛걸음을 하고 숙소를 왔다 갔다 한 것까지 포함하니 운동어플에 43 km가 찍혀 있었다.

밥을 먹고 일어서는데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이 찌릿찌릿했고 근육통에 다리를 절뚝거렸지만 이게 뭐라고 뿌듯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걸은 하루여서인지,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나서인지, 일주일 후에 만나자고 한 말을 지킬 수 있어서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20 km와 30 km와 40 km 걷기는 많이 달랐고, 남은 여정에서 다시는 40 km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다리를 주무르다 잠이 들었다.


D18: Moratinos ~ Reliegos, 40.2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