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도 이 길에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제 많이 걸어서 다리 피로가 안 풀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푹 쉬고 나니 그래도 괜찮았다.
숙소에서 나와서 얼마 안 되었는데 저 앞에 남자 3명과 여자 1명이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어둑어둑해서 잘은 보이진 않지만 내 친구들이다. 나는 발가락과 앞 발바닥만을 사용해서 총총 뛰어 빠르고 조용하게 다가가 짠! 하고 놀라게 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함께 깔깔깔 웃었다. 전혀 웃긴 일은 아니었으니 웃겨서가 아니라 반가움의 웃음이었다.
오늘은 평소에 걷던 산길이나 시골길보다는 아스팔트길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걷는 게 평소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만 걸어도 되고 오늘 목적지인 Leon에서는 연박을 하며 조금 쉴 거라 마음이 편했다.
12시가 좀 넘어서 Leon에 도착했는데 이번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1시도 되기 전에 걷기를 마무리한 것이.
그동안 열심히 걸어온 나를 위해 예쁜 식당으로 들어가서 먹고 싶은 메뉴를 마음껏 시켰고 와인도 병으로 주문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큰 도시고 내일은 내 생일이라 고급은 아니지만 호텔을 예약했다.
적당히 걷고 푸짐한 점심을 즐긴 후 나만의 공간에 누우니 행복감이 몰려왔다. 가방만 내려놓고 그대로 누워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벽에 드리우는 것을 한동안 보고 있었다.
나에게 행복은 삶에서 작은 순간들이다.
그래서 누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 물으면 어느 때라고 말하지 못한다. 내가 느끼는 대부분의 행복은 일상의 아주 평범한 순간이라 다 기억하기 어려웠다.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잠깐 동안의 감정이지만 나는 행복에 대한 역치가 낮은 편이라 자주 행복하다고 말하곤 한다.
낮에 좀 쉬다가 저녁은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과 우리가 처음 만났던 알베르게에서 내 위 침대를 썼던 데오도 함께 하기로 했다.
보름 넘게 걷다 보니 이제 길에서 지나쳐 온 사람들도 꽤 되고, 인상적이었거나 또 마주치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 분들은 여기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내가 빌바오를 방문하면서 이틀 뒤쳐졌었는데 어차피 넉넉한 일정으로 와서 천천히 가도 되었다. 날씨도 덥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걷는 거리를 늘려갔던 것은 이들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일주일 후에는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켰다.
오늘 저녁은 미리 내 생일을 함께 축하했다. 소박한 조각 케이크와 피자를 앞에 두고 포로투갈어와 이탈리아어로 돌아가면서 생일축하 곡을 불러 주셨다. 동영상으로도 남겨두긴 했지만 볼 때마다 감동적이다.
나의 특별한 날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그들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외롭지 않고 행복한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Leon에서 하루 더 머물면 잠시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이제 우리는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고 왔고 매일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과 영상을 올리고 있는데, 첫날부터 지금까지 지인들과 친구들이 댓글로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주변사람들에 불만이 많았고 서운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괴로워졌다. 며칠 만에 나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기까지 걸으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사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며 지난 힘들었던 시간들은 악연과 스쳐가는 인연들이 정리되려고, 아직은 철이 덜 든 내가 더 성장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책 없이 퇴사하고 이렇게 걷기만 하고 있는 것이 무모 해보일 수도 있지만 일단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한동안 미워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시간 낭비, 감정 낭비를 했었다. 이제 그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아도 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이 시간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면 또 다른 시련과 미운 사람들이 당연히 생길텐데 그때의 나는 조금은 더 덤덤할 수 있을까.
D19: Reliegos ~ Leon, 24.6 km
D20: Leon에서 하루 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