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_루틴과 요령이 생겼다.

적응하고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by 쑴이

레온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걷기 시작이다.

어제는 관광객 모드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딱히 할 것이 없어 차라리 걷는 게 낫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오늘 막상 걷는데 힘이 나질 않는다.

이제 순례길 여정의 3분의 2 즈음에 접어들었고 오늘은 유독 다들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나는 그렇게 앞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본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신발, 그을린 팔다리가 우리의 지난 시간을 말해준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300 km
그래도 더위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회가 될 때는 달걀을 삶아 간식으로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이 생활에서도 루틴과 요령이 생겼다. 적응하고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슈퍼가 있는 마을에선 6구짜리 달걀, 바나나, 방울토마토, 물, 그리고 초콜릿 같은 간식거리를 사고 묵는 알베르게가 취사가 가능한 곳인지도 미리 체크해야 한다. 현금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ATM이 있는 곳은 언제 지나는지도 신경 쓰고 있다.


걸을 때도 주로 일상적이고 소소한 생각을 한다. 점심은 뭐 먹을지 돈은 얼마 썼는지 숙소 가서 해야 할 일과 같은, 대개 사람들이 하루를 살면서 하는 생각들 말이다. 이 생활이 일상이 돼버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제 생각할 건 어느 정도 다 생각하고 정리가 되서인지 잘 모르겠다.

생활이 단순(+익숙)해진 만큼 생각도 단순해졌다.


순례길 초반에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했었고 그 이후에는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했었다.

내가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렸듯, 반대로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릴 뻔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대단한 깨달음을 얻을 것을 기대한다거나, 이 여정이 끝난 후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평소에 잊고 지내던 것들, 어떤 상황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그리고 회피하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 시험을 보고 나서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구나’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듯이, 이번 여정은 그렇게 나의 지난 인생 시험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물론 인생의 시험에는 정답과 오답이 없다. 하지만 내가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남들이 잘못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에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그것들이 정리되고, 내가 나 자신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어야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라는 가장 중요하고도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오잉, 이 동네는 무슨 일이람?!
영화세트장 같던 마을 풍경
줄 서서 먹는 걸 싫어하지만 시선을 이곳으로 고정한 채 40분을 서서 기다려서 먹었다. 참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맛은 비주얼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래간만에 먹는 등갈비라 흡족스러웠다.

오늘은 사람들과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걷는 것도 살짝 지루했어서 멀리서 보이는 마을이 많이 반가웠다.

그런데 마을 초입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고 어디선가 생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큰 장이 열려 있었고, 나와 같은 여행객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대극 영화 속 배우들처럼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에 일단 나는 사진 찍기 바빴지만 그 와중에도 이따가 뭘 먹으면 좋을지 먹거리들 스캔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번 주 내내 무슨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며칠 전 부르고스에서는 거리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EDM에 춤을 추더니만 오늘 여기 분위기는 꽤나 민속적?이다.

서울 한강 페스티벌을 보다가 갑자기 민속촌에서 사물놀이, 외줄 타기를 본 기분이랄까.

20년 넘게 50개국 넘는 곳을 여행 다녀봤지만 오늘과 같은 광경은 처음이라 신기해서 사진 몇 장을 SNS에 올렸더니, 한 친구가 '걸어서 세계 속으로'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적응하고 익숙해져서 조금 무뎌졌던 순례길에서의 깜짝 선물이었다.

복장은 페스티벌 용이라 치지만 저 헤어스타일과 수염은 오늘만 이런 것이 아닐 텐데...
운 좋게 숙소에서 구형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즐거워했고 공을 굴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D21: Leon ~ Hospital de Orbigo, 32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