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_오후 2시, 나만의 전투가 시작된다.

눈부신 것들은 대부분 아름답다.

by 쑴이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많이 보는 것 중 하나는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는 일이다.

배낭이 큰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보기보다 빠른 사람, 손잡고 걷는 사람들...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인생이라는 여행을 하는 것처럼, 각자의 짐을 지고 각자의 속도대로 묵묵히 걸어간다.


오후 2시, 나에게는 혼자만의 전투가 시작되는 시각이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많은 사람들이 1시~ 2시면 걷기를 마무리하곤 하는데 나의 걷는 속도가 느린 탓도 있고, 늦게 걸으면서도 멀리 가려고 매일 다른 대부분 사람들보다 1.5~2시간 더 걷고 있다. (가끔 젊은 친구들은 저녁 늦게까지도 걷기도 하지만)


앞 뒤로 동지가 있다가 1시가 넘으면 어느 순간 혼자가 된다. 홀로 땡볕을 걷더라도 괜찮았다. 광활한 길 한가운데 나만 있는 그 느낌도 꽤나 신선하고 힘들지만 성취감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 밀밭은 눈이 부시다. 반짝임을 머금은 바다와 비슷하다. 나는 풀이 눈이 부실 수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아스토르가에서 먹은 점심.

Astorga에 도착했다. 아는 얼굴들이 배낭 없이 돌아다니고 자리 잡고 앉아서 와인을 병으로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여기에서 묵는 사람들이 많나 보다.

나는 아직 9 km 가까이 더 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그래도 도착하고자 하는 날짜가 있고 무엇보다 숙소 예약을 했으니 몸을 겨우 일으켜 다시 땡볕으로 나를 내던졌다. 한동안 대형마트는 보지 못할 것 같아 굳이 돌아서 마트에서 먹을 것도 좀 샀다.


비디오를 켜서 덥다 힘들다 핸드폰 카메라에 대고 푸념을 해댔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았는데 날도 덥고 가방에 마트서 잔뜩 사재 낀 먹을 것들 때문에 어깨가 아팠다. 괜히 마트를 갔나 보다 후회감이 몰려왔다. 처음 공항에서 출발할 때 배낭 무게가 11kg였는데 지금은 한 13kg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일정을 마치고 노천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보니 오늘은 처음으로 그냥 눌러앉을까 고민됐었다. 특히 목적지 직전 마을, 그 마을의 끝에 있던 마지막 알베르게를 지날 때였다. 정면은 끝없는 그늘 없는 길이 보이고, 문이 열린 알베르게 안으로 사람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거의 발걸음을 돌릴 뻔했다. 하필이면 오늘은 처음으로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를 예약했었어서 내가 안 가면 나 때문에 예약을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녀가 되는 셈이라 그러질 못했다.


오늘도 그늘 없는 끝이 안 보이는 길이구나...

사장님에게는 3시까지는 도착할 거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던 나는 4시가 되어서야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3시 반부터는 알베르게 사장님에게서 톡이 오고 음성 메시지까지 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숙소는 기부로 운영되는 알베르게고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 혹시 내가 못 간다면 당일 워크인(walked-in)으로 손님을 받아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주스로 갈증을 해결하고 마당 그늘에 앉아 햇볕에 지친 피부에 보습제를 바르고 와인을 마시며 바람을 느껴본다.


낮잠을 자는 사람,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 정원에서 삼삼오오 대화를 하는 사람들, 각자의 방식대로 늦은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정원으로 나와 드디어 앉아서 숨을 돌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은 얌전하게 부는 바람에 맡기고 그늘에 앉아서 정원의 푸르름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눈이 부셨다. 눈이 부신 것은 대부분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눈이 부신건지 눈이 부셔서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지만.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 술, 음식들 마음대로 드세요. 여기는 당신들의 집입니다."

네이비색 셔츠를 반쯤 풀어 헤치고 반바지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알베르게 사장님은 어딘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신다. 옆에 앉은 여자분과 불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프랑스인이다. 나는 사장님에게,

"불어 할 줄 알아?"

"어. 나 프랑스 사람이야. "

"우리 이제 영어로 다 같이 대화하자."

라고 하여 정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알베르게 사장님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무 좋아서 알베르게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순례길 걷기로 몇 번 오다가 텐트를 쳐서 자기도 했고, 그러다가 알베르게를 시작했고 지금 이 집은 프랑스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샀고 손수 고치고 꾸민 곳이라 했다. 대출을 받아서 시작한 알베르게인데 기부로 운영하다니...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무슨 사연으로 타지에서 홀로 이렇게 살고 있는걸까... 아마 보통 사연이 아니거나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정원에 앉아 있던 대여섯의 사람들끼리 어쩌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게 되었는지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나도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사장님은 레옹이 썼던 것과 비슷한 작은 프레임의 선글라스를 머리에 꽂으며,

"쑴이! Embrace your pain! (그냥 너의 고통을 받아들여!)"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버둥거려 봤자 너만 힘들 뿐이라는 말을 하는데 미친놈(나쁜 쪽 말고)과 도인의 경계즈음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번 순례길이 두 번째라는 프랑스에서 온 여자분은 첫 순례길은 본인의 의지로 온 것이 아니라 했다. 하늘(God가)이 이곳으로 이끌어 오게 되었고, 그때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는 본인 의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흥미로웠다. '순례길을 걸어라'라고 정말 어떤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마음이 든 건지 궁금했지만 너무 'T'스로운 질문인 것 같아 차마 묻지는 못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저녁을 먹었다. 마을 입구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탈리아 남자분은 이 알베르게에 묵고 싶었지만 예약이 꽉 차서 이곳에서 저녁만 먹고 간다고 했고 하루 50km씩 걷는다는 라트비아 젊은 여자애도 목말라서 들렀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갔다. 배고픈 순례자를 위해 열려있는 곳이었다.


기부로 운영되는 곳이라 비용을 지불할 의무는 없지만 공짜라 할 수 없다. 아니, 설마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내 기준에서는) 나는 그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시설도 잘 되어 있는 편이고 음식들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서 나는 평소 묵었던 알베르게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박스에 넣었다.


저녁식사 후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남자분이 기타를 치며 사장님과 함께 노래를 했다. 이곳의 바이브와 잘 어우러지는 노래였다.


오늘 힘들었던 여정은 이곳에서의 음식과 대화들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늦더라도 묵묵하게 끝까지 해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전, 아까 이야기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아픔과 시련을 마주하고 이겨내는 중이구나. 나도 사장님 말씀대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 찾고 있는 중이다.


D22: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26.2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