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올림픽도 아니고 다큐 찍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
어떤 날은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그러다 갑자기 햇볕이 쨍쨍했던 날이 있었다.
운동화가 흠뻑 젖어 이틀 동안 운동화를 배낭에 매달고 걷기도 했고, 소소하게 소지품들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여행에서 아주 사소한 이벤트다.
오히려 이번 순례길은 예상보다 무난하게 진행 중이다.
고민 끝에 하루 쉬기로 했다.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고민이었는데 지도를 보고 나니 결정이 쉬워졌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오르락 내리락이 많은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발목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무리하면 다시 안 좋아질 수 있으니 안전한 선택을 하자 싶었다.
이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후반 100km부터는 숙소 예약이 어려울 수 있다고 해서 미리 예약을 다 해 놓은 상태인데 발목 부상이라는 변수가 발생했다. 6/18에 산티아고에서 만나자고 이탈리아 3인방 아저씨들과 했던 약속도 있고 숙소 예약만 안 했다면 천천히라도 가보겠지만 이 상태로 32km 산길을 갈 자신이 없었기에 더 이상 고민 없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jump라고 불렀다.)
택시는 어떻게 부르지? Uber 쓰면 되나? 몇 개 어플을 시도해 봤지만 모두 'no service' 지역으로 표기되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는
"여기는 20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야. 그런 게 될 리가 없지."
라고 하시며 콜택시를 불러주셨다.
택시로 이동하면서 어쩌면 내가 걸었었을 길과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길도 참 예뻤겠다 싶어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현명하게 판단했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택시비는 다시 돌아가는 비용까지 포함해서 계산했을 터라 싸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오늘은 전혀 걷지 않았으므로 알베르게 체크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마당 의자에 앉아 빨랫줄에 널린 매트 커버를 보면서 멍 때리기를 했다.
이탈리아 국적이지만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는 이뇨는 언젠가부터 계속 길에서 마주친다.
"나 오늘은 택시 탔어. 다리 때문에 걷기는 힘들 것 같은데 이제 알베르게를 다 예약을 해놓아서 어쩔 수 없었어."
"아, 그래 잘했어. 네가 만약 숙소 예약을 하고 펑크를 내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나는 너랑 앞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야."
"응. 당연하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기부로 운영되던 알베르게 때도 그날 나 무지 힘들어서 중간에 다른 곳에서 멈추고 싶었거든? 근데 약속을 해 놓은 거라 늦게라도 끝까지 갔잖아."
사실 알베르게를 예약하고도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도착을 못(안)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불인 곳도 있고, Municipal 알베르게의 경우 당일 선착순으로 받기도 한다. 그런데 기부로 운영되거나 보통 알베르게의 경우 금액이 싸다 보니 여러 마을에 예약해 놓고 그날 가고 싶은 만큼만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금전적 손해가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겨우 3 만원이기(보통 알베르게가 1박에 15 ~ 25유로) 때문이다.
이뇨는 본인 편하자고 정말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도 못쓰게 만드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며 내가 이야기에 끼어들 틈도 주지 않은 채 열변을 토했다. 실제로 그런 여자애를 만났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해서 너무 화가 났었다고 했다. 이뇨는 이 얘기를 며칠 후에 나에게 또 했다. 정말 화가 났었나 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돈을 버리는 건데 뭐 어떠냐라고 할 수 있지만 나도 이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과연 비용이 비쌌어도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이건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걷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에 대한 예의이다. 누군가는 너무 필요했던 숙소일 수 있는데 본인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니 어느 정도 존중하긴 하지만 여기에서도 얌체들은 있었다.
오늘 구간 점프로 인해 나의 완주에 약간의 흠집이(나만 아는)라도 안 나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결정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약속'을 택한 셈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탓에 지루하고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걷는 것이 그리웠다. 걸으러 왔는데 걷지 않으니 나만 수업을 땡땡이친 학생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부 구간을 건너 뛴 것이 나중에 과연 자신있게 완주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에 걸렸다.
같은 방을 쓰게 된 프랑스에서 온 자매들과 뉴질랜드에서 혼자 온 여자분은 울적해하는 나에게
"잘 생각했네. 넌 여기 즐기러 왔지 고통받으러 온 게 아니잖아."
라며 위로해 주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도
"이게 올림픽도 아니고 다큐 찍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
라고 해주어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걷기도 하고 낮잠도 자고 그랬더니 발목도 컨디션도 훨씬 나아졌고 내일은 다시 걸을 생각에 설렜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D-1 밤엔 어떤 기분일까...?
산티아고까지 140km를 앞둔 밤이다.
D26: Vega de Valcarce ~ Triacastela, 32.6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