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5_이 길, 곳곳에 핀 다정함

여행의 묘미

by 쑴이

'아~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티비 보고 싶다.'

게으른 어느 주말 하루가 그리운 아침이었다.

알베르게에서는 매일 눈떠지면 일어나는 게 너무 당연했고 그게 힘든지도 몰랐는데 순례길 후반이 되니 좀 늘어지고 싶었다.


체크아웃하면서 어제 친절하게 도와주었던 그 직원이 있는지 살폈다. 어제도 고맙다고 했지만 정신이 없었어서 괜찮은 모습으로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다. 뿔테 안경을 쓰고 뽀글 머리를 한 그녀가 보였다. 보통 여행이라면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나 작은 기념품이라도 줄게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짐으로만 다니고 있는 지금은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은 진심 담긴 말뿐이다. 그녀는 웃으며 괜찮아서 다행이라며 남은 여행도 안전하게 하라고 화답했다.


다리는 여전히 아프고 부어있지만 기분 좋게 마을을 통과하려는데 마을의 끝에 있는

시립(municipal) 알베르게를 지나는 중이었다. 알베르게 앞에 나와 있던 남자분이,

"너 다리 왜 그래? 다친 거야? 잠깐 들어와서 뭐 좀 먹고 갈래?"

라고 말을 걸어왔다.


알베르게에 머물고 있는 순례자들을 위한 간단한 조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편하게 먹으라고 권하며 다리 상태를 물으셨다. 바지를 살짝 걷었는데 실제로 아픈 것보다 보기에는 더 아파 보였다.

"이 상태로 어떻게 걸으려고 그래. 며칠 여기에서 쉬면서 병원 가보는 거 어때? 우리가 병원에 같이 가줄 수도 있어."

그 분들은 다리 부러진 '아기새'를 처량하게 바라보는 (객관적으로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분들이 보기엔 나는 한참 동생) 눈빛으로 걱정하셨다. 나는 통증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며 오늘까지 지켜보고 심하면 병원에 갈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을 예정이라 숙소에서 늦게 나왔는데 아침에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써버려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라도 안 되겠으면 다른 곳에 가서라도 연락하라고 하셨다.

그분들은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셨는데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내가 가는 것을 한참 보고 계셨음이 느껴졌다.


아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무심하게 차만 오고 갔다.

다행히 간간이 구름 낀 날씨고 아스팔트 길이 많아서 걷기에는 좋은 조건이었지만 대신 너무 지루했다. 게다가 오늘따라 낯익은 사람들도 지나가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싶은 식당이 있었는데 오픈 전이라 영업 중인 가장 가까운 식당에서 느긋한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뭐든 서두르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한두 시간 즈음 더 걸어야 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한국에서 반가운 영상통화가 왔다.

미국으로 MBA 하러 떠나는 (이제는 예전) 직장동료의 송별회를 하고 있는데 나의 빈자리는 화상으로라도 채우려고 몇몇 동료들이 모여서 전화했다고 했다. 회면 속에서 벌개진 얼굴로 돌아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침 한참 심심하고 외롭다 싶을 때였었는데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까 내 발걸음은 자동으로 씩씩해졌다.

우리는 '보고 싶다' '언제 오냐' 그 말 외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의 마음이 전해져서 갑자기 마음이 한구석이 찌릿해왔다.


"한 사람 당 한 개만 가져가세요."

마을에 들어서기 전, 순례자를 위한 아이스박스가 보였다. 가끔 순례길 중간중간에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을 기부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동안은 늘 그냥 지나쳤는데 느긋한 걷기 중인 오늘은 궁금해서 아이스박스를 열어보았다. 물, 음료수, 오렌지, 사탕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집에 흔히 있을 법한 간식들이었지만 이 박스를 꾸리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물을 한병 집어 들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혼자였는데 마음만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서 지친 몸과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멋있게 포장하지 않아도 긴 말 없이도 진심이 있다면 그 마음은 전해진다.

사소한 친절과 작은 성의라도 진심이 있으면 마음이 동한다.


마을에 도착해서 짐을 놓고 동네 구경도 할 겸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크스림을 사 먹으며 잠시 산책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말 안 통하는 동네 꼬마들에게도 "올라"하고 인사를 해보기도 했다.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오늘 아침부터의 일을 생각하는데 내가 웃고 있었다.


몸은 조금 지쳤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화가 나거나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D25: Cacabelos ~ Vega de Valcarce, 25.1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