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치열하게 걷고 있는 걸까
집을 떠나온 지 이제 딱 한 달이 되어간다.
어제 숙소에서는 며칠 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국 언니와 재회했다.
언니는 그 사이 일행이 생겼다. 언니와는 자주 일정이 겹쳤지만 우리는 서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 만나면 많이 반갑고 안부를 나누지만 딱 그 정도까지... 나는 그게 좋았다.
평소 등산을 즐긴다는 언니는 걸음이 빠르기도 하고 일행을 만드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늘 그랬듯 언니를 보내고 오늘도 내 페이스대로 혼자 걸었다.
순례길 막바지에 접어드니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3주째 매일 장시간 걸어서 다리 피로도 누적되었고 어제 내리막 길에서 관절에 무리가 되었는지 발과 다리 근육이 좀 아팠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동안 괜찮았어서 계속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나 보다.
어젠 산등성이에 위치한 마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에 더워서 여러 번 깼고, 깨고 나서도 같은 방을 썼던 러시아 아주머니가 코를 골아서 쉽게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풍경은 너무 예쁜데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외면하고 있었을 뿐...
아침에 산길을 내려오고 나니 쭉 뻗은 아스팔트 길이 보였다. 이대로 쭉 가면 도시가 나오나 보다. 그런데 오전부터 맑은 듯 흐리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로 한 중간이라 장대비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고생해서 오늘은 큰 배낭을 운송 맡겼기에 비옷은 없었기도 했지만 하루종일이 아닌 이상 비를 맞고 안 맞고 그런 것들은 이제 나한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두어 시간 비는 맞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나왔다.
(비옷은 챙겨갔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순례길 내내 한 번도 입지 않았다/입지 못했다.)
오늘은 단 몇 시간 사이에 숲길부터 도시, 아스팔트길, 비, 그리고 땡볕의 시골길을 모두 만났다.
젖었던 옷은 어느새 모두 말랐고 내 입도 말랐다.
점심때 물을 못 사서 물이(식수가) 약간 부족했다. 은근히 까탈스러운 나는 사 먹는 물 외에는 마시지 않았다. 스페인 수도시설이 잘 되어있다고들 하고 길 중간중간 식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물을 사서 마셨다. 그 까닭에 늘 짐이 무겁고 가끔 이렇게 물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솔직히 오늘도 막판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더 힘들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최근 너무 힘들었던 날들이 많았기에 그냥 참고 걸었다.
'이 정도는 이제 힘든 것도 아니지.'
부지런히 걸었던 덕분에 4시 즈음 식당에 딸린 숙소(여관? 정도)에 도착했다. 구석에 내 배낭이 도착해 있는 것도 보였다. 분명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직원이 타자를 치며 체크인 수속하는 것을 서서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이상함을 느꼈다. 속이 메슥거리고 소리는 멀리 있는 듯 들리며 앞이 깜깜해지는 증상... 아... 이 느낌 안다...
'나... 쓰러질 수도 있겠다... 어떻게든 앉든 눕든 해야 한다!'
심호흡을 하면서 나름 침착하게 뒷걸음쳐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나는 정말 티 안 나게 의자에 앉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체크인 수속을 하던 직원이 어느새 한 손에는 냉수를,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괜찮냐면서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했다.
방 키를 주면 알아서 가겠다고 했는데도 직원분이 손수 내 배낭을 메고 부채질을 쉬지 않으며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4, 5성급 호텔 아니고 시골 여관이었는데...) 티 안 났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이 어떻게 알았을까 했는데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고 알았다. 얼굴이 백지장이었다.
그 친절한 직원은 에어컨을 틀어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일단 물을 마시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누웠다. 그래도 오늘은 에어컨 딸린 독방이라 다행이었다.
솔직히 오늘은 너무 힘든 날까지는 아니었는데, 나도 놀랐다. 아마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물 안 마시고 햇볕 아래서 오래 걸어서 그런 듯하다.
숙소 직원의 재빠른 대처를 보니 가끔 더위 먹는 사람들을 보나보다.
나는 오늘 '시에스타(낮잠)'가 있는 이유를 백 퍼센트 이해하게 되었다. 왜 대낮에는 길에 나 혼자 걷고 있나 했는데, 대낮 야외활동은 위험하긴 하구나.
누워서 쉬고 나니 잔뜩 부어있는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걷고 있는 걸까?
걸으면서 연신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던 나는 언제부턴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힐링하러 여기에 왔는데 나는 왜 나를 혹사시키고 있는 걸까.
천천히 이 시간을 즐기고 싶어 일정을 여유롭게 계획했것만 지금은 날짜를 앞당겨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처럼, 마치 ‘일하듯’ 걷고 있었다.
끈기가 부족하고 독하지 않은 게 나의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마냥 느긋한 성격은 아니구나.
그리고 6월 18일에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친구들에게
"나도 그날 산티아고에 있을지 몰라"
라고 했던 말을 지키고 싶어서이다. 그것은 '약속'은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 빈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나에 대해 알아간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열심히'를 꾸준하게 강요받은 탓이다.
D24: El Acebo de San Miguel ~ Cacabelos, 30.7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