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_길 위의 이야기들...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

by 쑴이

순례길 27일 차,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가 변해있었다.


일단 살이 빠졌다.

세끼를 꼬박꼬박 먹고 중간에 간식도 잘 챙겨 먹고 있지만 매일 7~8시간 걸어서인지 체중을 재지 않아도 살이 빠진 게 확실하게 보였다. 나는 매일 반주(飯酒)도 하고 간식을 먹어서 이 정도지만 아주 초반부터 봐왔던 대만에서 온 쌤과 한국에서 온 언니는 얼굴형이랑 옷태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기에 살 빼러 왔다는 호주 남자분의 얘기가 괜한 말은 아니었다.


이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한동안 나를 무력감에 빠지게 했던 일에 화가 나지도 다시 떠올리지 않는다. 여기 오기 전까지, 그리고 순례길 초반까지는 생각해 봤자 바뀌지 않는 것들을 곱씹으며 혼자 화났다가 슬펐다가 했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생각에 사로 잡혀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혼자서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를 한다. 이 길에서 한 걸음걸음마다 내가 화가 났던 기억들과 상처받았던 기억들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분명 걷기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감사하는 것이 많아졌다.

나는 워낙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나는 언제 좋아지나 힘들었었다. 주변에 일이 잘되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보면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고 기뻐해주었다. 이래야 나한테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곧 있으면 내 차례가 오지 않을 까 싶어서...

이제는 나를 여기까지 이끈 그 시련마저 감사했다.


IMG_3923.HEIC 흙냄새, 풀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었다.
IMG_3924.HEIC 어제 하루 푹 쉬었더니 몸이 가벼웠다.

기분 좋게 아침에 몇 시간 걷고 화장실도 갈 겸 아침에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으려고 카페에 들어섰는데 어김없이 이뇨가 있었고 어떤 여자분과 함께였다. 이뇨는 이탈리안이지만 네덜란드에서 Phd를 마치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몰라 여기에 왔다고 했고, 나도 비슷하게 40대 중반에 갑자기 퇴사하고 힐링 겸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처음 만난 미국에서 온 질은 딸이 둘 있는 56세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이뇨도, 나도 이 길을 걷는 게 너무 즐겁다고 이야기하는 중에 질이 말했다.


"작년에 우리 오빠가 죽었어. 우리 엄마는 50대 초반에 돌아가셨고... 나는 이제 곧 오빠가 죽었던 나이가 돼. 나는 우리 엄마도, 오빠도 살아보지 못한 57세와, 그 이후의 시간을 살게 될 거야. 나는 오빠와 엄마를 떠올리며 미래 내 삶의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어."


종지만 한 에스프레소는 한 두 모금에 이미 끝냈고 나는 이 이야기만 끝나면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조금 진지한 주제로 바뀌어 화장실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다행히 이뇨가 너의 삶을 응원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대화가 이어졌고 이야기를 더 듣고 싶긴 했지만 우리 모두 아직 오늘의 걷기의 초반이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오랫동안 있을 순 없었다.

질과는 시간이 맞으면 산티아고 후의 일정을 함께하자고 하며 조금 같이 걷다가 헤어졌다.

IMG_6199.jpg 이렇게 통문어를 들고 호객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IMG_6204.jpg 포슬한 감자와 쫄깃한 뽈보

며칠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데 이후 일정 계획이 없던 나는 남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오늘 목적지인 사리아에 거의 다다랐다.

오늘은 중간에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점심 식사 때가 늦어졌는데 길 앞까지 통문어를 들고 나와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 순례길 내내 구운 소고기와 달걀 프라이 메뉴를(가끔은 빠에야나 피자) 주로 먹다 보니 다른 메뉴를 먹고 싶기도 했고 일단 배가 고파서 고민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나처럼 고객행위에 낚인 사람들로 이미 식당은 문전성시였던 터라 혼자 온 백인 여자분과 합석을 해야 했다. 그 여자분은 어제 같은 숙소를 썼었어서 얼굴은 서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점심을 함께하게 되었다. 나는 아일랜드에서 온 52세의 중년 여자분께


"저처럼 혼자 오셨네요. 여기에 온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나는 여기에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왔어요, 췌장암 완치 5년 생존..."


오전에 질과 대화에 이어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 축하할 일이지만 축하한다는 말 뒤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찰나의 순간 동안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와 같은 반응을 많이 봤었는지 그녀는 자연스럽게 본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투병 중에는 본인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었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녀가 그 지독하다는 췌장암을 이겨내고 800 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나는 다행이다, 축하한다고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녀의 심정에 공감을 하면서도 췌장암 완치는 어려운데 몇 기(1기, 2기..)에 발견했냐고 'T' 스러운 질문을 했다. '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겠구나' 내지는 '그 고통스러운 암을 잘 이겨내서 정말 대단하다'를 먼저 이야기해 줬어야 됐는데 말이다.


그녀는 점심을 먹은 후 시리아에서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넘어가서 순례길 사무소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다시 돌아와서 걷기를 할 거라고 했다. 그녀는 석사 과정 시작을 앞두고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를 하는데 눈빛이 반짝거리고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생각하는 중년의 에너지가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열정이 가득한 20대의 모습이었다.


오늘 만난 두 분의 이야기가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 그런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20대엔 취직,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30대엔 회사, 결혼이 대화의 주된 주제였다. 40대인 지금은 재테크, 슬슬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나이대별로 그때만의 삶의 마일스톤과 관심사가 있나 보다.


시련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그들의 아픔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큰 고통이었겠지만 그 힘든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에 어쩌면 모르고 살았을 삶에서의 '행복'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거의 매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 배운 것들이 생긴다.

직장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올 수 있는 스트레스

속상했던 일들...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큰 의미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나의 고민과 번뇌가 하찮다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모든 생각이 단순해졌다.


IMG_3978.HEIC 숙소 앞 성당에서는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D27: Triacastela ~Saria, 25.5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