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_이젠 눈에 담아 마음에 간직해야 할 때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by 쑴이

시골길에 안개가 옅게 드리워져 몽환적인 분위기가 자아내는 아침이었다.


한국에서 일출 보려고 하면 바다, 아니면 특별한 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일출보다는 도시의 일몰을 좋아하는데 순례길을 걸으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가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일몰이 잔잔하게 마음의 평온을 준다면 일출은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벅찬 희망을 준다.


모닝커피를 마시고 나오는 길에 까미노가 19번째라는 엄청난 분을 만났다.

간단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 나를 앞서 걸어가는 그의 배낭을 보고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이 바랜 배낭에는 훈장처럼 순례길 흔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와, 배낭 멋지다! 너는 순례길을 대체 몇 번을 완주한거야?"

"응, 나 이번이 19번째인데 프랑스길은 5번째야. 그리고 이게 내 두 번째 배낭이야. 나머지는 첫 번째 배낭에 있어."

나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첫 까미노는 언제였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왜 이렇게 순례길을 계속 걷는 건지 쉴 새 없이 질문 쏟아냈다.


그의 첫 까미노는 10년 전으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길을 걸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스페인인이고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벨기에에 살고 있지만 그의 국적은 스페인이라고 한다. 스페인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페르난도'라는 스페인 흔한 남자이름이고 본인은 스페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정체성은 스페인인이라고 했다.


그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그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계속 인생을 배워나가길 바라실 거라고 생각해서 일 년에 두 번씩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길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 특별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책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는 너에 대한 다큐멘터리 하나쯤은 나왔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프랑스길 외에도 다른 루트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같이 걷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페르난도에게 순례길은 조국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이끄는 곳이다.

페르난도와 배낭

마침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무렵, 며칠 전부터 마주치고 있는 중국에서 온 다이엔이 같이 걷던 일행을 버리고? 우리에게 합류했다. 다이엔은 낯가림이 1도 없고 누구와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였기에 나는 잠시 침묵하고 한동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다이엔이 먼저 여기 오게 된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는데 아주 신박했다.

"나는 게으름을 극복하려고 왔어. 보통 하루 종일 집에서, 그것도 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거든. 냉장고며 필요한 것들은 다 내 방에 있고 밥도 방 안에서 먹어. 엄마도 걱정하시고 건강도 나빠질 것 같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여기에 오게 됐어."

무기력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 같은 몸동작과 유쾌한 목소리였다.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게으르지 않은 아침형 인간인 나나, 순례길 전문가 페르난도는 ‘읭?‘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 같이 웃었다.


여기서는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해서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적응했다면서 자신에 변화에 신나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까지 내가 그녀를 관찰한 바로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평소 숨쉬기 운동만 한다는데 걷기도 잘해서(심지어 빠름) 집에서 누워만 있는다는 그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튼 다이엔은 일을 하지 않거나 적어도 규칙적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그런 직업을 가지진 않은 것 같았고, 페르난도도 자유로운 느낌이 있었는데 뮤지션이라고 했다.

방랑자와 집순이와 고리타분한 (구)직장인의 이상한 조합의 동행이었다.

걸으면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도 좋지만 이렇게 같이 혹은 따로 걷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미와 영감을 얻기도 한다.

다이엔, 페르난도 그리고 나의 그림자

페르난도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길을 조금 천천히 걷고 싶어서 얼마 멀지 않은 마을에 숙소를 예약했다고 했는데 나는 다이엔과 독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페르난도가 멈춘 마을에서 잠깐 쉬면서 맥주 한잔 하겠다고 그녀를 먼저 보냈다. 사실 갈 길이 많이 남아서 쉬는 것이 부담되었고 같이 걸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었다.





날이 더워 많이 지쳤다. 하지만 내일은 오전만 걸으면 되기 때문에 이렇게 힘든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땡볕이 이어지다가 앉을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무 그늘이 있길래 나는 가방을 내던지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내가 앉았더니 앞뒤로 가던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나 말고도 서너 그룹이 자리에 앉아서 너무 덥고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같이 힘드니까 힘들어도 힘이 났다.


초콜릿을 늘 가방에 가지고 다니지만 낮엔 먹을 수가 없다.
처음으로 가방을 내동댕이치고 길가에 앉았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앞의 풍경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어쩌다 그냥 뒤를 돌아봤는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 참을 쳐다볼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계획대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길을 찾기에 열중하거나, 힘들어서 뒤를 돌아볼 여력이 없는 것처럼 살면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니면 바쁘지도 않은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길을 잃은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숙명처럼 온 것이다.


내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들어설 때 어떤 기분일까...

내일은 순례길을 걸으면서 했던 생각, 만났던 사람들, 지나온 마을들을 쭉 떠올리며 마무리할 것이다.

한 번씩 뒤돌아서 보던 동트는 밀밭길도, 깜깜한 새벽 작은 마을 가로등 불빛도 이제 눈에 담아서 마음속에 간직할 때가 되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20km, D-1



D30: Melide ~ O Rua, 31.9 km